이베리아 반도로 떠나는 스페인 여행의 반려자 <스페니쉬 하트> 당신의 가슴을 붉게 물들일 열정과 낭만의 스페인 여행! - 바이올린과 기타 그리고 피아노가 풀어가는 마법의 로맨스 14곡의 애틋한 스페인 이야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금지된 장난-로망스>, 포스코 CF 삽입곡 등 수록. 기타리스트 장승호는 이 음반으로 2003년 스페인국왕 문화훈장을 받았다. 주한 스페인대사관이 선택한 기념음반으로 유명하다. *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인(GOOD 3047)으로도 만날 수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음악적 유산은 너무도 풍성한 탓에 나머지 유럽 음악―사실상의 서양 음악을 지배했던 중앙 유럽의 고전파 음악과 낭만파 음악 전통은 스페인 민족문화의 생명력에 비해 '주변적'이었다는 저변의 인식은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녔다. 어쩌면 전 유럽을 통틀어 단일 민족유산으로 가장 풍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스페인의 매우 다채로운 민속이 현대까지 이토록 잘 보전된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이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은 이베리아 반도의 자연 지리학적인 경계, 즉 19세기 중반까지 스페인의 각 지방과 그밖의 유럽 지방 간의 원활한 교류를 힘들게만든 장애물인 높은 산맥에 의해 줄곧 강화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언어적·인종적 다양성 또한 매우 놀랍다. 몇 개만 언급하자면 바스크어, 켈트족 기원을 가진 가예고(Gallego)어, 카탈랑어, 무어(Moor)어, 세파르딤어, 로만디어 등이 강력하고 이국적인 문화적 혼합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것들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이 특별한 환경에서 넘쳐났던 신종어 '크로스오버'를 만들어내는 스페인 민속음악과 예술음악 간의 전통적인 친근함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스페니시 하트》에 수록된 음악의 작곡가 중 몇몇은 스페인 밖에서 공부를 했는데, 가령 이삭 알베니스(1860∼1909)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 알베니스는 모차르트와 비슷하다고 할 정도의 신동이었는데 그는 10세에 피아니스트로서 스페인 전역을 순회 공연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 그는 직접 자신의 음악 감독 노릇을 하며 2년 후에는 밀항하여 남미로 가 그곳에서 음악적 모험을 계속했다. 약 10년간의 세계여행 동안 그는 프란츠 리스트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리스트는 알베니스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이전인 초기 습작기에 쇼팽과 더불어 많은 영향을 받은 작곡가였다. 카탈루냐 태생의 그였지만 알베니스는 다양한 스페인어(스페인 지방의 전래 민속), 가령 그의 유명한 탱고의 경우처럼 이스패닉적인 음악적 형태로 작곡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적 숙어로 작품을 썼기에 호아킨 로드리고는 그를―아이러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스페인의 '음악적 지리학자'라고 칭했다. <아스투리아스>와 <마요르카>는 지방색을 직접적으로 상기시키는 알베니스의 많은 작품들 중 두 곡이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국민악기인 기타아의 지배적인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스페인 음악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표현의 폭이 변화무쌍한 기타는 사실상 모든 고유의 음악형식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알베니스의 친구이자 동시대 사람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프란시스코 타레가(1852∼1909)는 현대적인 콘서트홀에 맞게 악기 음색의 가능성을 발전시켰던 당대의 선두적인 기타제작가 안토니오 토레스 세비야와 함께 20세기 클래식기타의 부흥을 가져온 주역이었다. 타레가는 그의 악기에 동시대의 연주회용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그의 친구인 알베니스의 곡을 포함하여 당대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많은 작품들을 기타로 편곡했다. 알베니스는 타레가가 기타로 편곡한 몇몇 곡이 피아노로 된 원곡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알함브라의 추억>('알함브라'는 무어인이 그라나다에 세운 궁전이다)은 타레가의 오리지널 기타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곡 중 하나다. 알베니스가 절정기의 원숙한 솜씨로 마지막 피아노 대작 《이베리아》를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기도 한 세련된 피아니스트 호아킨 말라츠(1872∼1912)는 이보다 좀더 작은 형식의 마스터였는데 그의 <세레나타>는 오래 전부터 주요 기타 레퍼토리로 자리잡아왔다. 알베니스의 또다른 친구이면서 그보다 연하인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는 말라츠와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한동안 샤를 드 베리오 2세와 함께 공부했다. 그는 알베니스와 마찬가지로 카탈루냐의 레리다 출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지방색의 스타일로 수월하게 작곡할 수 있었다. 다만 그라나도스의 작품에는 그리그와 쇼팽, 슈만의 영향이 또한 분명히 남아 있었던 탓에 그의 작품은 알베니스의 작품보다 좀더 낭만적인 색채를 띠었다. 어쨌든 그는 카스티야 문화에 대해 특별한 호감을 가졌고 그가 작곡한 최고의 음악은 유명한 카스티야 화가 고야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고야의 <마하의 초상 >은 그라나도스가 작곡한 동명의 곡인 토나디야(카스티야 지방의 대중적인 노래)에 영감을 주었다. 플라멩코 같은 <안달루시아>는 그의 《12개의 스페인 무곡》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그라나도스는 자신의 오페라 《고예스카스》가 1916년 1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성공리에 무대에 오르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해 전시(戰時)의 유럽으로 돌아오던 중 그가 승선해 있던 여객선이 어뢰로 폭격당해 영국해협에 가라앉게 되었다. 구명보트에 몸을 옮겨 실어 이미 안전하게 된 뒤였지만 그라나도스는 물에 빠져 있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뛰어든 후 영영 사라졌다. 일찍부터 저명한 기타리스트였던 바르셀로나 태생의 페르난도 소르(1778∼1839)는 유럽 전역에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불가피한 결과였는데 이는 스페인에서 군주제가 복구되면서 그가 강제로 왕위에 오른 조세프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형)의 군대에서 장교로 근무한 전적이 문제되어 고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의 손실은 런던과 파리,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득이 되었다. 이들 도시에서 그는 연주자로서 대단히 환영받았다. 후기에 그는 파리에서 덕망 높은 교육자로 지내면서 1830년 《기타를 위한 교재》를 출간하게 되는데 이 책은 이내, 기타 연주에 관해 저술된 책 중 가장 귀중한 도서로 꼽혔다. 그의 B플랫 장조 기타 연습곡은 슈투트가르트 작곡가이면서 피아니스트인 페터 신들러의 <소라야의 꿈>의 주제로 응용되고 있다. 다른 곡들을 작업하고 있던 도중의 이 작곡자는 페르시아의 전 여왕이었던 소라야의 서거 소식을 듣고 꿈속에 영감을 받아 일종의 '소리얼'(Soreal : 기타 작곡가인 소르와 소라야 여왕의 조합)적인 엘러지를 작곡하게 된다. 스페인적인 양식에 대한 페터 신들러의 천성적인 호감은 그로 하여금 이 CD 프로그램을 위해 우아함과 세련됨, 영감이 넘치는 편곡을 하도록 이끌었다.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를 교대로 등장시키면서 페터 신들러는 잘 알려진 스페인 작품에 대해 미묘한 변주를 줌으로써 알베니스 음악의 전형적인 특질인 자발성과 삶의 기쁨(joie de vivre)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스페인적인 스타일로 창작한 오리지널곡들은 《스페니시 하트》의 다른 작품들에 감탄스럽고 숙어적인 찬사를 보낸다. - 이안 멕파일 (슈투트가르트 체임버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