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Swing)! 그 옛날 RTL빅 밴드에서 태생한 스윙오케스트라는 베니 굿맨 사운드 오케스트라에 의해 대중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오늘날 현존하는 최고의 스윙오케스트라로 알려진 '킹 오브 스윙 오케스트라'가 그 대를 잇는다. 밴드리더이며 대편성의 오리지널 스윙곡들의 편곡을 담당하는 페터 플라이쉬하우어 Peter Fleischhauer는 정열적이고 완벽한 스윙 하모니를 갖춘 17명의 세계적인 전문연주인들과 솔로이스트로 이 빅 밴드를 구성했다. 두장의 음반에 각각 스윙의 역사 속에 미국식 고전이 된 베니 굿맨과 프랑크 시나트라의 스윙곡을 연주한다. 그 스타일을 비교해 청취하는 것도 큰 재미. 미국출신의 클라리넷티스트 피넛츠 헉코(Peanuts Hucko)는 루이 암스트롱, 글렌밀러, 그리고 베니 굿맨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던 오리지널 멤버로 3-40년대 화려했던 스윙의 전성기를 잘 대변해 주는 산 증인이다. CD 1, "Memories of You" 는 '킹 오브 스윙'의 가장 유명한 타이틀중의 하나로 72분간의 라이브로 구성됐으며 전반부의 모든 클라리넷을 연주한 엥겔버트 브로벨과 드러머이자 밴드 리더인 페터 플라이쉬하우어 사이의 정열적인 연주교감을 느낄수 있다. 특히 'sing,sing,sing'의 해석에 대해서는 이 음반의 절정을 보여준다. 또한 두 번째 음반 'Hello Frank'는 또 한명의 백인 스윙 제왕 프랑크 시나트라에게 헌정하는 음반으로 시나트라와 동시대의 음악동지이며 당시 이 음악의 대부분을 편곡하고 지휘했던 Bill Rogers의 참여로 이 음반을 한층 빛내주고 있다. 베니 굿맨의 딸인 레이첼 굿맨 이덜슨(Rachel Goodman Edelson)은 특별히 이 음반에 대해 이 밴드의 리더 페터 플라이쉬하우어에게 쓴 편지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아버지 베니 굿맨의 스윙정신을 기렸다.
대중음악을 근본적으로 바꾼 첫 번째 음악혁명 - 스윙(Swing) 21세기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스윙(Swing)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고루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 않다면 이 단어가 마크 맥과이어나 타이거 우즈와 관련된 경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윙은 20세기 미국음악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음악적 유산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의 록큰롤팬들이 신성한 '고전'으로 여기고 있는 비틀즈나 지미 헨드릭스 만큼이나 스윙은 대중음악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혁명이었다. 스윙이란 좁게는 3-40년대를 풍미했던 대중음악이었으며 보다 넓게는 재즈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리듬적인 특성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엘비스 프레슬리가 미국을 장악하기 전까지 구석 구석에 스며든 미국음악의 실질적인 정복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위세는 록큰롤이 탄생한 이후에도 미국음악 저류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그 흐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윙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베니 굿맨(1909-1986)과 프랭크 시나트라(1915-1998)는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자 동시에 모순된 위치에 놓인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지극히도 근접한 음악적 뿌리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지하다 시피 미국 음악사에 있어서 전혀 다른 페이지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그러한 결과로 실재로 두 사람은 활동기간 동안 주목할만한 관계를 갖았던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스윙의 역사 중 중요한 분기점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 줬으며 그 관계는- 역시 '스윙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 협력적이며 동시에 대립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두 거장의 활동은 스윙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에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벤 폴락 오케스트라 출신의 베니 굿맨이 처음으로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던 때는 그의 나이 25세 때였던 1934년, 아직 대공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성 초기 부터 이 악단은 승승장구를 달렸는데 그 출발은 34년 11월 NBC 라디오에서 특별 시리즈로 방송되었던 프로그램 의 음악을 맡으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이듬해 8월 이미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이 악단은 LA에 위치한 팔로마 볼룸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이 연주회는 역시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전역으로 중계 된다.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는 이를 통해 스윙시대를 도래시켰으며 스스로를 스윙의 왕으로 등극시켰다. 이는 음악에서 있어서 대중매체가 갖는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 준 최초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재즈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사건은 30여년간 미국에서 꾸준히 성장한 재즈라는 음악이 드디어 국민음악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했다. 더욱이 당시 베니 굿맨의 음악은 10인조 이상의 대형편성, 정교한 편곡, 그 사이 곳곳에 배치된 즉흥연주 그리고 경쾌한 네 박자의 리듬, 즉 재즈 오케스트라의 스타일을 최초로 정식화 시킨 플레처 헨더슨의 음악을 가장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더욱 컸다(당시 플레처 헨더슨은 자신의 악단을 해체하면서 베니 굿맨에게 자신의 편곡악보를 모두 팔았으며 베니 굿맨은 헨더슨의 악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재즈 최초의 콘서트홀 음악회였던 베니 굿맨의 38년 카네기홀 콘서트 중 한 대목을 차지했던 '재즈의 20년'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말해 주듯이 베니 굿맨의 성공은 재즈의 오랜 세월이 쌓아 둔 집적(集積)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스윙이라고 불렀다. 오랜 공황기의 막판에 이르자 스윙의 인기는 치솟았으며 베니 굿맨 외에도 도시 브라더스, 글렌 밀러, 아티 쇼와 같은 국민적인 인기의 백인 오케스트라 리더들이 줄이어 등장했다(상식적인 이야기겠지만 반면 듀크 엘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와 같은 인물들은 그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소수인종이였기 때문에 결코 '국민적인' 영웅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윙'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베니 굿맨을 능가할 수 있는 인물은 결코 등장하지 않았다. 40년대 초까지 빅밴드 스윙은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는 그 인기로 이 악단 출신의 독주자들이 독립해서 새로이 결성한 다른 오케스트라를 파생시켰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38년에 베니 굿맨 곁을 떠나 각각 자신의 악단을 결성했던 드러머 진 크루파와 트럼펫터 헤리 제임스는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같은 악단 출신이었지만 진 크루파와 헤리 제임스가 독립하여 구사한 음악은 그 색깔이 조금은 달랐다. 진 크루파가 탁월한 스윙을 추구하면서 베니 굿맨 스타일의 스윙을 고수했다면 헤리 제임스는 도시 브라더스나 글렌 밀러의 스위트 사운드에 비교적 가까운 음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진 크루파가 탁월한 트럼펫 주자 로이 엘드리지를 영입했을 때 헤리 제임스는 39년 뉴저지 주 러스틱 캐빈 클럽에 출연하면서 그곳에서 노래도 하고 MC도 보며 가끔씩 웨이터 일도 거들던 스물세 살의 한 깡마른 청년과 18개월간의 계약을 맺는다. 보직은 전속 가수였으며 주급으로 단돈 75불이 지불됐다. 이미 스타덤에 올랐던 빙 크로스비처럼 중저음의 미성을 구사할 줄 알았던 이 프랭크 시나트라라는 이름의 청년은 금새 밴드 리더들 사이에서 그 이름이 알려졌고 이듬해 그는 토미 도시 오케스트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밴드리더였던 토미 도시와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악단의 간판급 인물로 부상했다. 그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음악적 변화의 징후였다. 즉 빅밴드를 통해서 청중들로 하여금 열광케 했던 격렬한 스윙으로부터 발라드 스타일의 스위트 사운드는 점차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결정된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러한 스윙과 스위트 사운드의 분화를 더욱 재촉시켰다. 미정부는 전시재정 확보를 위해 유흥업소에 중과세를 부가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스윙 연주자들은 그들의 직장을 잃었으며 반면 징집으로 부부, 연인들이 헤어지게 되자 사람들은 더욱더 애잔한 실연가에 스스로를 위로 해야만 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대부분의 빅밴드 단원들이 소속되어 있던 미국 연주자 노조(AFM)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그 개념이 없었던 인세지불을 요구하면서 장기간 레코딩 파업에 들어갔고 빅밴드 스윙의 전성기는 이 시점에서 실질적인 막을 내리게 된다(이 파업은 44년 11월이 되서야 끝이 난다). 하지만 레코드 산업은 이 시기에 이미 새로운 음악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간파했다. 당시 대부분의 가수들은 일정기간 동안 임시적으로 오케스트라와 계약을 맺었을 뿐 대부분 노조에 가입해 있지 않았는데 이때 음반사들은 오케스트라와 밴드리더가 아닌 솔로가수들을 새로운 스타로 만들기 시작했으며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 시점이 만들어 낸 최초의 스타였다. 토미 도시 오케스트라와의 계약을 중도에 파기하고(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프란시스 코폴라의 영화 <대부>의 대사 속에서도 인용되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콜럼비아사와 43년 계약을 맺고 연이은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솔로가수 시대를 열게 된다. 그것은 최초 '오빠부대(Bobby Soxer)'의 형성이자 빅밴드, 밴드리더로 대표되던 스윙시대의 완전한 종언이었으며 동시에 오늘날에는 흔히 성인취향의 팝(Adult Contemporary)이라고 불리우는 고전적인 팝(Pop Classic) 혹은 전통적인 팝(Traditional Pop)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평론가 헨리 플리잰츠는 프랭크 시나트라를 가리켜 "베니 굿맨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이전의 가장 탁월한 대중스타"라고 평한 바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베니 굿맨과 프랭크 시나트라는 스윙의 흥망성쇠를 상징하는 다분히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프랭크 시나트라로 시작된 고전적인 팝이 2-30년대 브로드웨이 히트곡들로부터 5-60년대 노래까지를 자신의 레퍼토리로 삼음으로써, 같은 시기 모던재즈의 스탠다드 레퍼토리와 많은 부분 중복되고 있음은 유의 깊게 봐야할 대목이다. 즉 20년대 재즈시대(Jazz Age)의 브로드웨이의 대중음악이 은연중에 재즈의 어법을 수용하고 있었듯이 40년대 고전적인 팝의 탄생은 스윙에서부터 분리되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윙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결코 배제시키지 않았는데 이렇게 형성된 재즈와 고전적인 팝 사이의 친화성은 미국음악 전반에 스윙의 요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표적인 재즈저널인 [다운비트]가 매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인기투표에서 프랭크 시나트라가 수차례에 걸쳐 남자가수 부분에 선정되었던 것을 구태어 들추지 않더라도 베니 굿맨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역사상의 협력'은 매우 명백해 진다. 특히 50년대 들어서 두 사람은 매우 정통적인 성향의 빅밴드 스윙을 다시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베니 굿맨은 40년대 그의 6중주단 활동으로부터 다시 빅밴드로 돌아와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특히 미국무성의 지원으로 유럽(1950), 동아시아(1956-7), 남미(1961), 소련(1962), 일본(1964) 등지를 순회하며 연주한 것은 베니 굿맨 뿐만 아니라 스윙을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각인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엔터테이너로서 이미지를 굳힌 프랭크 시나트라의 50년대역시 40년대 보다도 오히려 스윙이라는 요소를 자신의 음악 속에서 더욱 부각시켰는데, 그것은 확실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이 등장한 시점에서 그가 택한 보수적인 반격이었다. 흔히 그의 완숙기라고 불리우는 캐피틀 시절(1953-60) 발표한 십여 장의 앨범 중에서 그는 '스윙'이라는 단어를 무려 넉 장의 음반 타이틀에서 사용했으며 동시에 [다운비트]지 애독자 투표에서 54년부터 62년까지 무려 9년동안 남자가수 부문의 정상에서 결코 내려 오지 않았다. 록큰롤이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던 시점에서 시나트라의 활약은 대중음악의 세대간의 분화를 재촉했으며 동시에 스윙이라는 것을 시대를 초월한 미국음악의 고전으로 자리 잡도록 만들었다. 같은 시기 모던재즈의 홍수 속에서 빅밴드를 통해 여전히 스윙을 고수했던 베니 굿맨의 존재는 시나트라와 역시 동일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미국식 고전의 정립이다. 이후에도 수많은 종류의 미국음악이 등장했고 더욱 많은 사랑을 받은 음악들이 존재했지만 적어도 스윙은 미국적인 정서 골수에 스며든 거의 유일한 스타일이다. 비록 필자의 짧은 전망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2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도 결코 변하지 안을 것이다.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사회자 빌 크리스털이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내용을 페러디하며 부른 노래가 이 음반에도 수록된 였듯이 오늘날 스윙의 생명력은 올해 오스카를 휩쓴 <아메리칸 뷰티>에 대한 한 국내언론의 표현으로 대신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적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된다." - 음악에서는 오로지 스윙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 글.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