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
4 Mars 1678, Venise tremble.
Les convulsions de la terre se poursuivent…
Camilla perd les eaux,
Antonio vient hâtivement, fragile, curieux, au monde.
P4.
Parce qu’il est rouquin, Giovanni Battista est appelé Rossi par ses amis. Il est coiffeur-barbiez, violoniste et c’est son père.
En silence derrière lui,
Le petit Antonio Vivaldi écoute.
P5.
Sur l’instrument de son papa virtuose, Le bras du fils s’allonge pour décrochez ses premières notes.
P6.
Comme un soleil qui meurt, Venise brille plus que jamais, satellisant l’Europe entière autour de son art, ses merveilles et ses divertissements.
P7.
Le théâtre, lieu si populaire ici, que les spectateurs semblent faire partie intégrante de la pièce.
Fait si naturel que le spectacle semble parfois être remisé en coulisse.
P8.
Le 23 Mars 1703, Antonio devient Don Antonio.
Dieu dans sa mansuétude, allait accueillir ce frêle homme d’église.
Sans doute sera-t-il flatté de compter parmi les siens l’homme qui chantera sa gloire avec tant de passion.
P9.
La pietà, clair de lune constant qui console les orphelines de la lagune de leur sort tragique.
Le jeune prêtre roux va pousser les portes de cet établissement pour y prodiguer 35 années durant des cours de musique d’une inventivité inouie.
P10.
Venise l’extravagante aiguise le sens du jeu en ce 6 février 1707.
L’affrontement de 2 prêtres violonistes, divertit par sa singularité.
L’ambassadeur d’Autriche déclare
son favori vainqueur...Pourtant, il semblerait qu’à l’applaudimètre ce jour là, c’est bien Vivaldi qui l’ait emporté.
P11.
L’hiver 1708, Venise prise dans les glaces se rattache temporairement à la terre ferme.
La fantaisie vénitienne voit dans ce frimas.
Le cortège exotique de Frédéric 4, roi du Denemark et de Norvège, en visite touristique.
P12.
La main glacée de l’hiver pousse les foules à se réchauffer dans les théâtres et les réduits de jeux.
La maison de Dieu, elle aussi offre sa flamme; Vivaldi conduit le chœur de la Pietà...
Les enfants, Faites entendre à ces nobles gens ce que je sais déjà... vous êtes les plus grandes voix d’italie.
Il profite de la présence de l’illustre roi pour éxecuter une de ses sonates. Séduit,
Frédéric 4 quittera Venise avec entre autres souvenirs une œuvre dédicacée par le compositeur.
P13.
L’Estro Armonico: La tradition éclairée par l’inspiration.
12 Concertos en forme d’hommage aux codes établis.
Vivaldi utilise pour la dernière fois le concerto grosso où préfigurent les concertos pour solistes exaltant l’instrument roi: le sien, le violon.
P14,
“Gesù,Giuseppe, Maria..” un prêtre dans l’empire du mal.
À 34 ans, son enthousiasme d’enfant pour le theater le rattrape.
Il monte son premier mélodrame intitulé “ Ottone in Villa” sur un Livret de Domenico Lalli.
P15.
“Les gens vont au théâtre pour se divertir, non pour penser.”
Armé d’une lucidité pragmatique, et avec l’aide indéfectible de son père, Vivaldi se surpasse dans l’Opéra. Oubliant sa santè fragile,
il devient impresario au théâtre San Angelo, ce qui lui impose la nécessité du succès.
Et si le talent et le hasard ne suffisent pas à décrocher les bravos, il les anroche à la foule d’un solo étourdissant en fin de représentation.
P16.
Le pacte signé entre Venise et la mer nécessite nombre d’arrangements. Depuis longtemps maintenant,
ici à l’abri invasions barbares, depuis Marco Polo surtout,
le marchand et l’aventurier se fondent dans le caractère vènitien.
Alors il négocie aussi, Antonio.
P17.
Il négocie un arrangement entre harmonie et désordre. “ Il Cimento dell’armonia et dell’invenzione ”,
sa huitieme œuvre est publiée en 1725. Vivaldi, un accent populaire dans ses notes,
nous conte l’histoire simple du cycle de saisons de la terre. Des saisons de l’homme.
P18.
Forcément il avait arrêté de la dire la messe...
SEQUERE DEUM....
Et c’était l’asthme direct!
Koff..Koff…
Symptôme dù à “une étroitesse de poitrine” qu’il avait gardée de sa naissance.
Et bien Rossi il n’y a décidement plus de saisons.
Très spirituel.
P19.
La musique le transcendait.
Il entretenait avec elle un rapport exclusif.
A Mantoue, Vivaldi découvrait une voix qui ne le quitterait pas, celle d’une enfant de 12 ans.
Anne Girò allait devenir sa cantatrice attitrée.
P20.
Griselda: l’opéra aux arias de revanche vivaldienne.
Ce drame pour musique raconte comment une reine issue de la plèbe gagne sa noblesse à force d’abnégation.
P21.
“Griselda” avait d’ailleurs pu être l’occasion pour le jeune homme de théâtre Carlo Goldoni,
de remiser dans son tricorne ses réserves quant à la voix d’Anna.
Sauf qu’elle a quand même une toute petite voix...
D’ailleurs elle aussi est toute petite, et puis.. en plus elle est moche!
Bravo, Brava,,, Brava Anna!
Bon, c’est vrai que ce soir, on a encore fait un carton!
P22.
En 1737, deux de ses opéras sont décommandés à Ferrare: Le cardinal et archevêque de la ville,
courroucé par ce prêtre qui ne dit pas la messe et qui s’affiche au côté de sa diva, Lui Ferme les portes de la villa.
P23.
Naufragé sur les nécifs de son angoisse, Vivaldi toujours avide de reconnaissance, accuse les coups acharnés de l’infortune.
P24.
Désabusé, il quitte Venise en 1739.
À Vienne, son admirateur l’empereur Charles 4 le protégera..
Mais le mécène s’éteint la même année.
Avec lui sombre le destin de Vivaldi.
Le maestro meurt seul le 28 juillet 1741, Il a 63 ans.
Il est enseveli au cimetière des pauvres à Vienne.
한글 번역본
P3.
1678년 3월 4일, 베네치아 지역에는 큰 지진이 계속 되었다.
카밀라 칼리치오(비발디의 모친)의 양수가 터졌다.
허약하고 호기심 가득한 아기,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는 이렇게 서둘러 태어났다.
P4.
지오반니 바티스타는 붉은 머리카락 덕분에 친구들에게 로씨(Rossi-빨간)라고 불렸다.
이발사였고,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그는 안토니오 비발디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연주할 때면, 어린 안토니오 비발디는 그 뒤에서 조용히 듣고는 했다.
P5.
명연주자인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어린 비발디는 아버지의 재능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P6.
해가 지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것처럼, 베네치아는 유럽 전역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술과 놀라움과 즐거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P7.
베네치아에서 극장은 매우 인기가 있었고, 마치 공연의 일부인 것처럼 많은 관객들이 존재했다.
가끔 어떤 극들은 상연되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P8.
1703년 3월 23일, 안토니오 비발디는 사제 서품을 받는다.
신은 그 자애로움으로 이 허약한 남자를 교회의 품에 받아들였다.
신의 영광을 열정으로 노래할 이 중에 가장 칭송받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P9.
피에타는 베네치아의 고아원 겸 음악학교였다. 피에타 합창단은 버려진 아이들에게 달빛처럼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젊은 사제 비발디는 피에타 합창단을 만들었고, 놀라운 창의력으로 아이들에게 곡을 만들어주며 35년간 음악 수업을 해 나갔다.
P10.
베네치아는 1707년 2월 6일 기괴한 유희에 몰두했다. 지금은 잊혀진 음악가 지오반니 루에타 역시 사제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오스트리아의 대사는 비발디와 루에타에게 음악 경연을 하게 한다.
사제이면서 바이올리니스트인 두 사람의 경연은 그 독특함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대사는 그가 후원하는 루에타를 승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그 날 사람들의 박수갈채는 비발디의 승리임을 말해주었다.
P11.
1708년 겨울, 베네치아가 추위로 얼면서 육지와 잠시 연결 되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상상해 왔던 것이 얼음 속에서 이루어졌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인 프레드릭 4세의 이색적인 여행 행렬이 베네치아로 향하게 된다.
P12.
겨울의 한파는 사람들을 따뜻한 극장으로 모여들게 했고, 유흥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교회도 그 열정을 다 쏟아냈다. 비발디는 피에타 합창단을 이끌었다.
« 얘들아, 저 고귀하신 분들이 너희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자. 너희들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목소리를 가졌단다. »
그는 이 유명한 왕 덕분에 그의 소나타 중 하나를 연주할 수 있었다. 프레드릭 4세는 그의 음악에 매혹되었고,
이 작곡가가 혼신을 다한 소나타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베니스를 떠난다.
P13.
조화의 영감(L’Estro Armonico) : 영감을 통해 빛난 전통
오마쥬 형식으로 쓰여진 12곡의 협주곡. 비발디는 합주협주곡 형식을 마지막에 사용하는데 솔리스트들의 협연은 악기의 왕이자 비발디의 악기인 바이올린을 빛나게 해준다.
P14.
“Gesù,Giuseppe, Maria..” 악한 제국의 사제.
그는 34세에 연극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열정에 휩싸인다.
그는 도메니코 랄리의 대본을 바탕으로 그의 첫번째 통속극 오페라인 « 별장의 오토네 황제(Ottone in Villa) »를 만든다.
P15.
« 사람들은 즐거워지기 위해 극장에 가는거야. 생각하기 위해서 아니라. »
아버지로부터의 끝없는 지원과 본인이 타고난 실제적인 통찰력을 바탕으로 비발디는 오페라 장르에서 활약한다.
좋지 않은 건강상태도 잊은 채로 산 안젤로 극장(Teatro San Angelo)의 오페라 단장을 맡으면서 그는 성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단원들의 재능과 기회가 박수갈채를 이끌어내기 충분하지 못했을 때면, 그는 놀라운 연주로 공연의 끝에서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끌어내곤 했다.
P16.
베네치아는 바다와 닿아 있는 지리적 특성 탓에 수없이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
야만인들을 피해 정착한 옛 시대로부터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동방으로 떠나기까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는 상인과 모험가의 성향이 있어왔다.
그리고 안토니오 비발디 역시, 모험을 하기로 한다.
P17.
그는 조화와 혼돈 사이에서의 타협점을 찾아냈다.
그의 8번째 작품인 « Il Cimento dell’armonia et dell’invenzione(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가 1725년에 발간된다.
그는 우리에게 매우 유명해진 선율을 통해 계절이 순환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의 계절, « 사계 »다.
P18.
그는 어쩔 수 없이 미사 집전을 더 할 수 없게 되었고,
신의 뜻을 따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천식이 다시 시작된 탓이었다.
« 콜록...콜록.... »
기관지가 좁아지는 증상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 로씨 ! 이 이상 훌륭한 « 계절 »은 더 이상 없겠소 ! »
« 과찬이십니다. »
P19.
그의 음악은 훌륭했고, 그는 독보적인 창작 활동을 지속했다.
만투아 지방에서 비발디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안나 지로라는 이 12살 소녀는 비발디에 의해 정식 성악가가 된다.
P20.
그리젤다 : 비발디가 선물한 아리아의 오페라
이 오페라는 평민 출신인 여왕이 자기 희생의 강요 속에서 어떻게 고귀함을 지켜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P21.
« 그리젤다 »는 한편으로는 젊은 극작가였던 카를로 골도니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안나의 목소리에 대해서만큼은 칭찬을 아꼈던 그에게도 말이다.
« 너무 목소리가 작은 게 흠인데.... »
« 게다가 키도 작고, 거기다 못생겼잖아 ! »
« 훌륭해 ! 훌륭해 안나 ! »
« 좋아 ! 오늘 저녁 공연은 매우 훌륭했어 ! »
P22.
1737년, 페라라 지역에서의 오페라 공연 두 개가 취소된다.
그 지역의 추기경이자 대주교는 비발디가 사제로서 미사를 집전하지도 않으며 성악가와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것에 분노했다.
결국 페라라 지역에서의 상연은 금지된다.
P23.
불안감에 사로잡힌 비발디는 항상 인정 받는 것에 목말라했고, 불행이 계속 되는 것을 원망했다.
P24.
절망한 채로, 그는 1739년 베네치아를 떠난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그의 후원자인 샤를 6세가 돌봐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샤를 6세는 그 해 세상을 떠난다.
1741년 7월 28일, 63세의 나이로 대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는 불행한 운명의 끝에서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비발디는 빈에서 가난한 이들의 공동묘지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