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레시브 음악의 위대한 유산, 뉴트롤스 - 이근이(음악평론가) 1986년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는 참으로 장대하고 이색적인 공연이 열렸다. 바로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 음악의 대표적인 건반주자 장 미셀 자르(Jean Michel Jarre)가 그의 후원자(곧 음악산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도시 전체를 무대로 삼아 거대한 이벤트를 개최한 것이다. 도시의 고층 빌딩이 장 미셀 자르의 손짓에 따라 수시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황홀한 변신을 하였다. 레이저 빔을 이용한 장 미셀 자르의 키보드는 도시의 밤하늘을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자, 이 공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70년대 이후 서구 대중음악 역사에서 대단히 이채로운 공간을 열어젖힌 프로그레시브 음악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인가, 아니면 모든 진보적 가능성을 상실한 채 단지 거대한 이벤트의 아이디어맨으로 전락한 것이다. 아쉽게도 뜻있는 음악평론가들은 후자를 꼽았다. 그들은 장 미셀 자르를 음악산업자와 공연기획자, 그리고 첨단과학의 축제를 위해 동원된 한 어릿광대라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프로그레시브 음악. 전자기술의 도움을 얻어 60년대 후반부터 자생하여 70년대에 황금기를 이루고, 적어도 서유럽 일부지역에서는 80년대 이후 점점 사라져간 이 장르에 대해, 그리고 80년대 이후 프로그레시브 음악의 상징적 그룹으로 꼽히고 있는 불세출의 위대한 아트록 그룹 뉴 트롤스(New Trolls)에 대해 보다 상세한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나마 지난 시대의 대중음악사를 간략히 훑어볼 필요가 있다. 서구 팝 뮤직의 역사에서 1960년대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시기는 광란과 저항과 고독한 개인주의가 한 몸에 두루 섞인 격정의 시기였다. ''영국의 침입''(British Invasion)으로 불리는 비틀스(Beatles)의 미국 상륙 이래 적어도 팝 뮤직에 있어서 미국과 유럽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말았으며 여기에 미국 팝 뮤직의 뿌리가 되었던 흑인음악(재즈와 블루스)과 백인음악(포크 뮤직)이 서로 뒤섞이면서 연속적인 개체발생을 반복해나갔다. 이 시기에 수많은 ''문제적'' 양식들이 다수 출현하게 된다. 우선 비틀스로 대표되는 세련되고 예민한 록 뮤직이 독자적인 아성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흑인 음악의 대표주자였던 재즈 또한 ''크로스오버''(crossover)와 ''퓨전''(fusion)이란 말을 새로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음악 실험으로 몰두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프로그레시브 뮤직은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였다. ''프로그레시브''에 대한 사회학적 정의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뜻하지만, 팝 뮤직에는 이 뜻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프로그레시브 뮤직을 선도한 그룹들이 일정하게 사회비판적인 성향(특히 핑크 플로이드!)을 띄긴 했지만, 아무래도 ''기존의 음악 양식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새로운 실험에 대한 강렬한 의지''로 줄여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초기의 프로그레시브 주도자로는 무디 블루스(Moody Blues), 킹 크림슨(King Crimson),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rmer),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음악이 필연적으로 갖추어야할 ''대중성'', 즉 상업성을 의도적으로 배척하였으며 기존의 상업적 대중음악 질서가 요구하는 일체의 행위를 거절하였다. 뜻밖에도 대중들은 자신들을 무시한(또는 무시하는 방법으로 구애한) 프로그레시브 뮤지션에게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화려했던 프로그레시브 뮤직의 전성기는 1980년대를 고비로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final cut]를 끝으로 핑크 플로이드가 해산한 이래 프로그레시브 뮤직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반젤리스(Vangelis)에게 유산처분권을 넘겨주고 서서히 임종을 고한다. 프로그레시브 뮤직의 상속자가 된 반젤리스는 무려 50여대의 전자 올갠을 무대에 올려놓고 공연을 하는 등 애를 썼지만 결국 헐리우드로 무대를 옮기고 만다. 수십 가지 악기를 1천 번이 넘도록 혼자서 연주하고 믹싱하여 만든 [tubula bells]의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도, 신서사이저의 달인으로 불렸던 장 미셀 자르도 단지 충격적이고 환상적인 사운드만을 필요로 하는 영화음악에 몰두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뉴 트롤스가 등장한다. 물론 그들은 프로그레시브 음악이 점차 사멸해가는 80년대 이후에 등장한 신생 그룹은 아니다. 1966년 무명 그룹으로 출발한 이래 80년대 후반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명반을 만들어내면서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음악의 상징적 그룹으로 추앙받는 그룹이 바로 뉴트롤스이다. 문제는 그들이, 핑크 플로이드로 대표되는 영국, 탠저린 드림(Tangerine Dream)으로 대표되는 독일 등 다른 나라의 주력 군단과 달리 우리에게 너무 늦게 소개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꽤나 중요한 요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대중문화의 수용사적 측면이 어떠한가에 따라 해당 예술에 대한 의미 부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록 음악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그들이 80년대 중반 이후에나 우리에게 소개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다행스런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식상한 실험에 빠진 프로그레시브 음악(또는 그 수용)의 대안으로, 전자음향 장치를 극도로 억제하면서도 최고 수준의 환상적인 음향을 빚어낸 뉴 트롤스가 부각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서구의 다른 나라와는 독특한 프로그레시브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의 전통을 최고의 수준에서 융합시킨 그룹으로 국내 마니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끈 바 있다. 그들의 모든 앨범은 절대 명반이자 희귀본으로 꼽혀 콜렉터들의 집요한 추적을 받기도 하였다. 이번에 CD로 소개된 이 음반은, 이탈리아의 정평있는 음반사 ''FONIT CETRA''가 71년과 76년에 각각 발표된 두 장의 LP를 하나로 묶은 것으로, 수없이 멤버 교체를 해가면서도 특유의 고전주의 미학을 단 한차례도 실퍠한 적이 없는 뉴 트롤스의 진가를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는 명반 중의 명반이다. 어쿠스틱 록과 고전음악의 융합을 이뤄낸 71년의 걸작 ''Concerto Grosso Per 1''과 신디사이저를 앞세워 본격적인 프로그레시브의 진수를 보여주는 76년의 대중적인 걸작 ''Concerto Grosso Per 2''. 이 두 걸작을 한군데 모은 이 앨범만큼 프로그레시브의 장대한 음악성으로 빠져들 수 있는 앨범은 따로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