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dullah Ibrahim (압둘라 이브라힘)

“사람들은 압둘라 이브라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를 숭배한다. 그동안 ‘니나 시몬’에게 쏟아부었던 경외심을 이제는 그에게 바치면서… 그의 연주를 들으면, 셀로니어스 몽크의 평온한 환생을 보는 듯하다.” - 영국 <가디언>지 “나는 그의 이름이 실린 레코딩이라면 무엇이든 매료될 준비가 돼 있다.” - 팻 매스니 인종 차별이 극에 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 피아니스트와 그를 사랑한 백인 여성. 사랑을 위해 낯선 스위스 땅에 정착.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재즈계의 거성. 그리고 소설같은 데뷔... 다분히 드라마틱한 스토리이다. 결국 부부 사이가 된 그 연인이 바로 압둘라 이브라힘과 가수 사티마 비 벤자민. 재즈계의 거성은 다름 아닌 듀크 엘링턴이었다. 1962년 스위스 취리히의 한 클럽 - 압둘라 이브라힘이 남아프리카에서 건너와 트리오로 연주활동을 하고 있던 곳이다. 어느날 우연히 듀크 엘링턴이 이 클럽에 들렀다가 이브라힘의 연주에 감명을 받고 그와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1965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과 몇 번의 공연에 함께 연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를 미국으로 초청해 현지 재즈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도 바로 듀크 엘링턴이었다.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솔로활동을 하면서 엘빈 존스와 돈 체리, 가토 바비에리 그리고 최근에는 맥스 로치와 다니엘 슈나이더같은 뮤지션들과 교류를 해왔다. 압둘라 이브라힘은 자신이 태어난 아프리카가 가진 순수성을 진실된 피아노연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1934년 9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타운에서 태어난 그는 7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 미국의 찬송가와 가스펠을 들으며 성장하였다. 이후 재즈에 관심을 갖고 윌리 맥스 빅밴드와 투세도 슬리커스 같은 밴드를 거쳐,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재즈 밴드인 재즈 이피슬스에 합류하게 된다. 첫 데뷔음반을 발표한 60년도부터 현재까지 그가 발표한 앨범은 대략 50여장이 족히 넘으며, 한해에 무려 4장의 앨범을 선보일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는데, 재미있게도 이브라힘의 음반타이틀을 보면 '아프리카' 혹은 아프리카와 관련된 지명, 단어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그의 음악적 모태가 바로 아프리카이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대체로 셀로니어스 몽크와 듀크 엘링턴 같은 재즈 뮤지션의 영향을 받아 재즈적인 어프로치를 많이 들려주었던 반면, 점차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고 그와 관련된 곡들을 작곡하여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바로 이슬람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들 수 있다. 원래 달라 브랜드라는 이름이었지만, 이슬람에 심취하며 지금의 압둘라 이브라힘으로 개명할 정도로 그에게 이슬람은 아프리카와 함께 또 다른 정신적, 음악적 뿌리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일반적으로 연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음악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아프리카 특유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도 아니며, 익숙한 방식으로 민속악기들을 통해 아프리카 음악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있지도 않다. 그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 민속과 토속적인 음악이 아닌, 아프리카라는 곳이 갖고 있는 정신적, 내면적 정서이다. 또한 재즈의 자유와 즉흥적 묘미를 가미, 자연스레 아프리카의 이미지와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어찌보면 이브라힘의 음악을 아프리칸-재즈라 할 수 있을텐데, 사실상 아프리칸 재즈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거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이 아프리카 출신이고 미국사회에서 이들이 혼혈-니그로, 크레올-이 되면서 이들에 의해 재즈가 탄생되고 영위되었기 때문이다. 뉴올리언즈를 시발점으로 하는 재즈 자체의 탄생이 이미 인종과 악기간의 퓨전(Fusion)이 된 혼혈상태라 할 수 있다. 글. 강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