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색소폰은 솔로연주건 협연이건 항상 완벽한 일체를 이루며 듣는 이에게 '살아있는 행복한 순간' 을 안겨준다....금속악기 색소폰이 이렇게도 차갑지 않게 들릴 수 있을까." - 프랑스 재즈잡지 '노트' / 재즈평론가 필립 르노 -
"한국의 유니크한 뮤지션, 전위 색소폰 주자, 강태환" - [재즈는 살아있다] 소에지마 테루토 -
어느날 문득 강태환을 떠올리면 곧바로 그의 낭랑하고도 격정적인 음의 소용돌이가 머리속에 파고 들어와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은 생생한 흔적을 느끼게 된다. 아티스트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너무도 강렬하다. 바로 그 이미지가 강태환의 기상천외한 음악세계을 창출해 내고 있으며 현대 전위재즈의 최전선에 설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인 것이다.
강태환은 모던재즈 이후의 현대 재즈사를 이끌어 가고있는 한국의 프리뮤직 아티스트이다. 재즈 역사에는 프리재즈, 혹은 아방가르드 재즈라고 기록될지 모르나 강태환은 완전즉흥을 전문으로 하는 이른바 프리뮤직을 추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코트 조플린의 랙타임에서 출발하여 스윙, 밥, 쿨, 그리고 1950년대의 모던재즈에 이르는 미국흑인 (아프로 아메리칸)의 정통재즈, 혹은 퓨전이나 근래의 상업적인 재즈만을 재즈라 생각하고 있으나 진정한 매니아라면 그러한 편견은 버려야 한다. 물론 개인의 취향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재즈는 언제나 동시대를 앞서 나갔으며 60년대 이후의 재즈는 프리재즈, 혹은 아방가르드 재즈라는 이름으로 분명히 현대 재즈사를 이끌어 가고 존재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속에 살고 있으며 여기서 강태환의 입지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배경설명을 하도록 한다.
모던재즈까지 재즈를 주도해오던 미국은 재즈 종주국으로써의 유일한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60년대 중반부터 프리재즈에 영향을 받은 유럽과 일본의 재즈가 새롭게 탄생되어 막강한 영향력으로 새로운 재즈사를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오네트 콜맨, 존 콜트레인등이 제시한 프리재즈라는 새로운 물결에 진지하게 몰두한 유럽의 젊은 뮤지션들은 아프로 아메리칸 재즈, 즉 미국의 정통재즈와는 달리 현대음악의 요소를 적용한 유럽형 즉흥재즈를 만들었고 일본도 나름대로의 재즈를 창조하는데 몰두했다. 그러한 현상은 계속 확산되어 오늘날은 러시아, 캐나다, 한국등 세계 여러나라에 현대재즈가 퍼져 탁월한 뮤지션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적어도 60년대 이후의 재즈는 세계 공통어가 되어 버렸다. 다시말해 60년대 이후의 현대 재즈사는 세계 여러나라들에 의해 평준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미국은 그후 존 존, 프레드 프리스, 엘리어트 샵 같은 기상천외한 전위 즉흥파가 70년대 말에서부터 80년대 초에 걸쳐 뉴욕을 무대로 새로운 전위재즈를 탄생시킨 것도 포함한다. 어쨌든 재즈는 각 나라마다 토착화 되어가며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가운데 한국에서도 당당히 현대 재즈사를 이끌어 가는 세계적인 인물이 탄생되었다. 바로 알토 색소폰의 강태환이다. 정통재즈 조차도 활성화 되지 못했던 한국에 전위적인 프리재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강태환과 같은 뮤지션이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남지만 유럽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강태환도 나름대로의 철학과 노력으로 한국에 프리재즈를 탄생시켰다. 이런 훌륭한 아티스트가 한 손에 채 꼽혀지지도 않을만큼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 있는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아무튼 한국으로서는 대단히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는 사건이었다.
강태환의 연주는 흔히 파격과 놀라움으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무대에서의 전위적인 행동이나 이벤트를 하는것은 아니며 오히려 방석위에 차분히 앉아 오직 연주에만 몰두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연주가 시작되면 기상천외한 주법과 테크닉과 철학들이 무대에 펼쳐진다. 조성도 박자도 없이 잔잔하게 음을 끌다가 순환호흡 혹은 논브레싱을 사용하여 두개의 소리를 동시에 내는 하모닉스주법이 이어지고 갑자기 강태환 특유의 격렬한 텅깅이 지속된다. 전위적인 그의 테크닉은 모두 자신이 직접 개발한 것으로 세계 최첨단의 대열에 올라있으며 거기에 그는 자신의 철학을 보탠다. 그 안에는 한국의 전통음악, 특히 정악의 호흡이 있고 현대의 미술세계가 있고 종교가 있고 세계역사가 있고 자유가 내재되어 있다. 그는 연주자로써의 기본요소인 테크닉과 연주자의 철학을 결합하여 음악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강태환은 1944년에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클라리넷을 불기 시작했다. 그후 서울예고에 진학해 클래식을 공부했으나 차츰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알토 색스폰으로 전향했다. 미군기지에서의 빅밴드 활동을 시작으로 68년 젊은 나이에 자신의 그룹을 결성한 강태환은 모던재즈를 연주하며 그룹의 리더로써 여러해 동안 재능을 발휘하였다. 프리재즈에 깊은 관심을 갖게된 그는 존 콜트레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나름대로의 테크닉을 연구하다 1978년 한국 최초의 프리재즈 그룹인 강태환 트리오를 결성하게 된다. 강태환을 리더로 하여 퍼커션의 김대환과 트럼펫의 최선배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당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연주자들이었지만 상업성을 철저히 배제한채 생계의 보장도 없는 예술성의 추구에 몸을 내 맡겼다. 당시는 프리재즈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이해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척박한 환경이었으나 마침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에서 활동무대를 제공해 매월 한차례씩 연주를 해 나갔다. 공간사랑에서의 연주는 그후 86년까지 76회를 기록했는데 그들이 매월 새로운 레파토리를 발표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팬뮤직 페스티발에서 독일의 민속 타악기 주자인 라인 하르트, 김덕수 사물놀이와 함께 공연을 가졌으며 시립교향악단과 “관현악과 재즈를 위한 수작”, “창과 알토색스폰을 위한 한소리”등을 협연 함으로써 타 장르와의 만남을 시도하며 영역을 넓혀 갔다.
85년에는 김덕수 사물놀이와 일본공연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전술한대로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프리재즈가 태동하여 미국재즈의 아류가 아닌 일본의 토착재즈가 숙성되어 있었고 또한 유럽의 즉흥음악계 특히 독일에도 깊숙히 진출해 있었다. 하지만 강태환 트리오도 분명히 한국적 토양을 갖는 독특한 한국 재즈를 창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전위적 임프로비제이션이나 악기편성등은 일본 프리재즈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본의 프리재즈를 이끌어 가고있던 뮤지션들은 강태환 트리오의 일본출현을 호의적으로 받아 들였으며 그때부터 한.일간의 교류가 이어져 87년에는 일본 순회공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전위재즈 평론가인 테루토 소에지마와의 만남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에지마는 60년대 일본 프리재즈의 거점인 “신주꾸 뉴 재즈홀”을 주재한 것을 시작으로 프로듀서로, 혹은 평론가로써 그야말로 일본 프리재즈계의 진행과정을 샅샅이 이끌어 온 산 증인이다. 세계 각국의 전위재즈 페스티발에 관계하여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또한 해외 재즈 페스티발의 기록영화를 제작해 실황을 전파하기도 하는 등 세계 재즈계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 역시 한국의 새로운 즉흥음악을 처음 접하고는 놀라움과 함께 강태환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강태환의 연주활동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과의 교류를 계기로 강태환은 1988년 색스폰의 우메즈 가츠토키등 일본 굴지의 뮤지션들과 함께 Far East Ensemble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의 멤버로 독일의 Moers International New Jazz Festival에 참가했다. 메르스 페스티발은 해마다 진보적이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발굴하여 그것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 최대의 전위재즈 축제인데 뉴욕의 신 즉흥파로 활동을 개시하던 프레드 프리쓰, 존 존, 빌 라스웰, 데이빗 모스등이 83년에 처음으로 출연 제의를 받고 기쁨과 놀라움을 금치못했을 만큼 권위있는 축제이다. (필자는 89년의 제18회 메르스축제에서 그들을 만나 역동적이고 파워플한 연주를 듣게 되었다.) 또한 88년에는 서울에서 건국 이래 최초, 최대로 한강에서 국제 재즈 페스티발이 열렸다. 서울올림픽 문화예술 축제의 일환으로 서울시가 마련한 것인데 에반 파커(알토색스), 앤드류 시릴(드럼), 피터 코발트(베이스), 다카세 아키(피아노), 그리고 강태환 트리오등 최첨단을 걷고 있는 유럽, 미국, 한국, 일본의 즉흥파들이 대거 출연했으며 한국으로서는 참으로 역사적인 축제였다. 에반 파커와 강태환이 동질성과 상이함의 교차로 빚어내는 색스폰 듀오는 결코 흔히 볼 수 없는 소중한 이벤트로 행복감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강태환 트리오는 88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룹활동을 중단하고 각자 솔로의 길을 택했다. 그 시점에서 집단즉흥의 한계를 인식하고 보다 더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태환은 곡의 구상과 주법의 개발에 더욱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을 오가며 솔로활동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후인 1991년 그는 일본의 사토 마사히코(피아노), 다카다 미도리(퍼커션)와 함께 동그라미 트리오(To nkrami Trio)를 결성하여 메르스 재즈 페스티발에 또 다시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두번째의 그룹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 그룹은 리더가 없고 공연때만 만나는 프로젝트 그룹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완전 즉흥연주를 추구하고 있다. 사토 마사히코는 현대재즈의 중요한 혁신자중의 한사람으로 칭송받고 있는 존재이고 다카다 미도리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타악기 주자로 한국의 민속음악 형식을 빌어 마림바 산조를 만들거나 판소리와 가야금의 고수대신 자신의 타악기로 장단을 치는 실험적인 아티스트이다. 연주때만 만나기 때문에 각자의 솔로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고도 그룹활동을 할 수 있는 합리성를 갖고있는 이 그룹은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탄탄한 팀웍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즉흥음악을 창조해내며 아시아의 인스피레이션을 전하기에 충분한 그룹이었다. 동그라미 역시 활발한 활동을 펼쳐 92년 가을에는 러시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모스크바의 재즈축제에 참가했고 94년에는 홍콩, 타이랜드, 시드니 순회공연을 펼쳤으며 95년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강태환은 당분간 현재처럼 솔로와 동그라미 트리오의 일원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작은 변화가 있다면 2년전부터 타악주자 박재천과의 듀오로 가끔씩 소규모의 공연을 다니고 대학을 순회하며 학생들에게 워크샵을 겸한 연주활동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가 설 무대는 너무도 적다. 재즈 매나아들 조차 그의 음악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은 그를 안타깝게 하지만 여태까지도 그랬듯이 그는 매일 4시간 이상 연습을 하며 새로운 음악을 구상할 것이다.
한국의 재즈팬들은 언제쯤 강태환을, 아니 현대 재즈에 눈을 뜰 것 인가......
글. 전무영(공연기획가)
Discography
KANG TAE HWAN KOREAN FREEMUSIC LIVE IMPROVISATION / 1989. 예음레코드
KANG TAE HWAN "TOKAEBI" / JAPAN VICTOR
KANG TAE HWAN & SAINKHO NAMTCHYLAK LIVE
Live at WETHER REPORT. Matsue, Japan on March 8. 1993 / FREE IMPROVISATION NETWORK RECORD
FIN CD-9301
TONKRAMI IN MOERS
Live at Moers International New Jazz Festival 1991 on May 19. 1991 / NIPPON CROWN Co.
CRCJ-9110
TONKRAMI WITH NED ROTHENBERG "PARAMGODD"
Recorded at CRS Studio No.1 on September 8. 1994 / NIPPON CROWN Co.
CRCJ-9125
KANG TAE HWAN / Chap Chap Rccord
KANG TAE HWAN "ASIA SPRIT"
Live at Pit-Inn, Tokyo / Ad For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