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피아노는 무척 단순한 악기다. 피아노의 복잡한 액션구조를 발명한 크리스토포리가 들으면 주먹을 불끈 쥘 얘기이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피아노의 음색을 빚어내는 요소란 이론상 해머가 현을 치는 속도와 소리의 길이를 끊는 페달, 단 두 가지뿐이다. '강약과 장단'뿐인 것이다. 이와 달리 현악기는 활을 긋는 속도와 활을 현에 내리누르는 힘을 달리해서 현란하게 음색을 바꿀 수 있다. 비브라토의 효과를 달리하거나 미묘하게 음높이를 조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선율로 된 단 한 소절의 피아노 연주에서 수없이 다양한 피아니스트의 개성을 찾아낸다. 마이올린 소리를 연상시킨다느니, 트럼펫 소리를 연상시킨다느니 하며 온갖 연상과 비유를 끌어대기도 한다. 신기한 일이 아닌가.
분명 피아노와 음색의 관계에는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기 힘든 신비가 숨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피아노 음색의 다양한 가능성에 눈 뜨게 된 것은 드뷔시와 라벨의 인상주의 악곡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까지도 많은 가능성이 작곡자의 계획과 상상 속에 잠겨 있었을 뿐, 악보에 잠재된 수많은 음색의 조합성이 실제 연주로 발현되기까지는 다시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근대적 피아니즘의 계보 위에서 음색의 팔레트가 가진 신비의 문고리를 최초로 잡아당긴 사람이 발터 기제킹이었다.
기제킹은 1895년 프랑스 남부의 리옹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독일인이었다. 부친은 의사면허를 갖고 있었으나 개업의 활동이 체질에 맞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그가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은 각지를 떠돌며 곤충을 채집하고 강의를 하며 학술지에 글을 기고하는 것이었다.
자연과학에서 철학까지 박학다식한 교양인
어린 발터는 아기 티를 벗을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프로방스의 돌산을 돌아다니게 됐다. 푸르고 붉은 색깔의 나비들을 따라다니며 채집망을 휘저었다.
조금 과장해서 넘겨짚자면, 음색에 대한 그의 남다른 감수성은 프로방스의 양광과 나비 날개 등 자연의 풍요한 '색채'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유랑에 가까운 생활을 한 탓에 발터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는 문학에서 수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독학으로 익혔다. 피아노에 취미를 붙여 열심히 연주하기 시작했으나 그것 역시 독학이었다.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믿기 힘든 일이다.
'다섯 살 때, 나는 문득 읽고 쓰기를 할 줄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아무것도 남에게 배워야겠다는 욕구를 느낀 적이 없다"고 그는 훗날 말했다. 그러나 장성한 뒤의 그는 자연과학에서부터 철학, 역사학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한 교양인이 되어 있었다. 열여섯 살이 되자 그는 최초의 '공교육'을 받게 된다. 부모의 나라인 독일로 가서 하노버 시립 음악원에 입학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유일한 스승 칼 라이머를 만나게 된다. 둘의 만남은 어느 쪽에서 보나 행운이었다.
라이머는 예전의 전통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아노 교수법을 실험하고 있었다. 팔과 손의 과도한 긴장을 완화하여 유연함을 강조하고, 대신 팔의 무게를 이용해서 다이내믹을 빚어내는 방법이었다. 라이머는 일찌감치 이 방식의 주법이 지닌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었지만 기존의 연주법이 이미 굳어진 학생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가르치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다음 세대의 규범이 될 거장'을 만들어내겠다고 결심한 라이머에게 광대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지만 기존의 타건법에 물들지 않은 '독한 피아니스트'가 찾아온 것이다.
청년기의 기제킹 역시 라이머의 자연스러운 타건법에서 자기가 원하던 섬세한 음색을 찾아낼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라이머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레퍼토리를 더욱 넓혀갔다. 프로 연주가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1915년부터 이듬해까지 베토벤 소나타 전곡 공연을 가지며 연주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16년 그에게 제1차 세계대전의 징집영장이 발부됐다. 서류를 펼쳐든 징병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프랑스에서 보낸 이 청년이 애국심에 불타서 프랑스 병사들을 공격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다행이 기제킹은 보르쿰섬의 군 기지로 보내져 병사들을 위한 클럽에서 댄스곡과 유행가를 연주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그가 이 역할을 불쾌하게 생각한 것같지는 않다. 오히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가벼운 댄스곡을 몇 곡 작곡해 출판하기도 했다. 그중 '숄시 바치 폭스트로트'는 한동안 유행을 타기도 했는데, 작곡자의 이름은 악보에 씌어진 대로 '빌킹기제'로 알려지게 됐다.
전쟁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그는 연주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부조니, 코른골트, 쇤베르크 등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그는 피아노에서 동시대 음악을 대변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드뷔시의 섬세한 색채를 해석해내는 데 있어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평가됐다. 베를린 성악아카데미 연주홀에서 성공적인 연주회가 끝난 뒤 당시 독일의 대표적 공연 기획가인 아르투르 베른슈타인이 그를 찾아왔다. 그와 손을 잡은 기제킹은 1926년 첫 미국 연주를 가져 대 성공을 거두었다. 이 무렵부터 녹음자료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됐는데, 이 시기 완성된 그의 연주 특징은 30여 년이 지나서까지 사실상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반(半)페달 기법
바쁜 연주활동 가운데서도 그는 은사 라이머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아노학에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 라이머와 공저로 '현대 피아노 연주법'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된 것은 무엇보다도 세밀한 터치와 페달의 사용, 그리고 암보에 대한 강조였다. 암보에 대한 강조는 '곡을 유기적으로 완벽하게 알고 있지 않고서는 연주에서 직관적 통찰을 표현해낼 수 없다'는 주앙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직관과 천재에만 의존해 피아노 예술의 신비를 풀어나가려 하지 않았다. 책에서 동시에 강조된 것은 자신의 연주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었다. 두 사람은 연주가가 스스로 자기 연주에 대한 최고도의 냉정한 관찰자가 될 것을 요구했다. 직관과 객관의 상호작용, 이것이야말로 드뷔시의 인상주의 악곡이 요구하는 최고의 터치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이런 요구는 한편 연주자에 대한 과도한 주문이기도 했다. 훗날 외르크 데무스는 다음과 같은 반농담을 던졌다. "정말 그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기제킹 선생님의 마스터클래스를 찾아갔더니 말이죠, 글쎄 우선 그 책을 교본으로 쓰지 않더라구요, 더군다나 그 책과는 전혀 다른 충고를 하기도 하구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지 뭡니까."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기제킹은 연주활동을 금지당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푸르트벵글러와 더불어 나치가 총애한 대표적 음악가로 인식된 것이다. 사실 전쟁 중에 그의 연주활동은 횟수나 질에서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나치의 집권층에 의식적으로 접근하거나 충성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따. 실제로 1933년 나치가 집권한 뒤에도 그는 유대인이었던 매니져 베른슈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세간의 눈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1947년 연주금지에서 해제됐지만 미국 연주를 시도했을 때는 망명 유대인들을 비롯한 거대한 데모 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느느 피아노 건반을 구경도 못한 채 다시 귀국 비행기에 올라야만 했다. 1953년이 되어서야 다시 미국 연주를 시도할 수 있었다. 미 당국은 경호대를 붙이기까지 했지만, 동서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정치 현실에만 민감해져 있던 미국인들은 이미 그의 '혐의'를 잊고 있었다. 카네기홀의 청중들은 거듭된 앙코르와 기립박수로 그에 대한 '사면'을 공표했다.
그의 연주는 특히 드뷔시와 라벨 등 인상주의 악곡에서 강한 '인상'을 던졌다. 비평가들은 "그의 피아노는 때때로 해머가 없는 듯이 작동한다"고 평했다. 최고의 피아니시모조차도 대형 연주장의 끝자리에서까지 명료하게 들렸으니 음향학자들이 혼란을 느낄 정도였다. 페달을 현과 미세하게 접촉히켜 음색을 변화시키는 '반(半)페달' 기법도 그는 기가 막히게 소화해냈다.
소리의 음영을 최고도로 살리는 섬세한 연주를 펼쳤으면서도 그는 피아노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리허설조차 갖지 않고 무대에 서는 일도 흔했다. 자신의 피아노를 각국으로 공수하며 연주여행을 펼친 미켈란젤리나 호로비츠와는 분명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피아노 외의 분야에서 그가 이룬 업적은 역시 '나비'였다. 그는 1만종 이상의 나비 표본을 수집했고 그 중 두 종류는 세계 최초의 종 발견으로 공인됐다. 그 중 하나의 이름은 '치가나 기제킹기아나' (기제킹이 발견한 집시나비) 였고 또 하나에는 '~발테리'라는 이름이 불텨졌다.
확실이 검증되지는 않은 일화를 하나 인용하자면, 어느 날 야외 연주회에서 그는 색다른 형태의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연주가 중단되자 관객들은 의아해했다. 잠시 후 키가 190센티미터나 되는 이 거구의 연주자가 눈에 보이지 않은 물체를 따라다니며 허둥대자 청중은 박장대소했다. 결국 모기를 손가락 사이로 포획한 뒤에야 그는 연주를 계속했다.
천수를 다했다면 훨씬 많은 음반과 곤충의 목록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아니 스테레오 시대의 개막에 이르기까지만 녹음활동을 펼쳤어도 섬세한 그의 터치는 훨씬 정교한 음향의 기록물 속에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50대의 이른 나이부터 그의 옆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사신은 처음 자동차라는 비수를 들고 그에게 접근했다. 1951년 그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간신히 쇼크 상태에서 헤어나왔지만 1955년 다시 차량 충돌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그를 데려가는 데 실패한 사신은 대신 옆자리에 않아 있었던 그의 부인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서 아연해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해 다시 연주에 매달렸다.
노여움에 불타는 사신은 다시 다른 비수를 빼들었다. 1956년 런던 애비 로드의 EMI 스튜디오에서 기제킹은 베토벤소나타 전곡녹음을 진행 중이었다. 연주를 이어나가던 그가 갑자기 녹음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복통을 호소했다.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그는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61세. 병명은 급성 췌장염이었다. [자료제공 : JOY CLAS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