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27일 16세의 하이페츠 소년이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공연을 가졌을 때 뉴욕은 이 놀라운 소년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연주가 끝나자 미샤 엘만은 '홀안이 무척 덥다'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레오폴드 고도프스키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그렇겠지. 그런데 피아니스트에겐 별로야"라고 짖굳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하이페츠의 충격이 얼마나 켰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 때의 연주에 대해 올드리치(Richard Aldrich)는 뉴욕 타임즈에 이렇게 썼다. "하이페츠는 놀랄만큼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힘과 매끄러움, 모나지 않은 유연함이 넘치는 그리고 활기과 색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톤이 돋보였다.... 특히 그 기술적인 숙련도에 있어 비견할 바 없는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하이페츠의 뛰어난 기교에 대해 올드리치는 절제된 표현으로 극찬을 한 셈이지만, 3년 후 그가 런던 무대에 나타났을 때, 버나드 쇼는 절제를 잃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하이페츠에게 써보냈다.
"그대의 연주를 듣고 나와 나의 아내는 아주 불안해졌다네. 자네가 그 초인적인 완벽한 연주를 계속하여 질투심 많은 신의 노여움을 산다면 그대는 횡액을 입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일세. 그러므로 저녁마다 잠들기 전에 기도를 드리는 대신 무엇인가 좀 서툴게 연주하는 연습을 해두는게 좋을 거야. 인간이란 자네처럼 완전무결하게 연주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 두게."
버나드 쇼가 제 정신이었드라면 하이페츠의 기교가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완벽으로 부터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모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페츠의 연주는 듣는 사람의 귀를 현혹시켜 완벽하다는 환상을 갖게 할만큼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그 무렵 쇼의 과장된 극찬을 반박하려고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일이다. 엘만이나 크라이슬러, 플레쉬 등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어느 한 사람도 하이페츠의 기교에 대해 어딘지 미흡하다고 생각하거나 고개를 갸웃뚱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기술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가장 드높은 성좌를 그에게 내줄 것이냐는 데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공(外功)의 고수(高手)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가 내공이 허약하다는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이페츠의 기술적인 탁월함을 누구 못지 않게 인식하고 있었던 플레쉬(Carl Flesch : 1873-1944)는 '바이올린의 기술적 발전의 극치를 보여준 현대적인 성과'로 그의 역사적 의미를 매김했다. 이어서 플레쉬는 하이페츠의 운지와 운궁의 위력에 대해 '단추를 누르자 마자 최대출력과 최고속도로 움직이는 기계'에 그를 견주었다.
최고성능의 기계에 견주어진다는 것이 연주가의 영광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시게티라든가 카잘스였다면 플레쉬도 기계에 견주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플레쉬는 하이페츠의 공허함을 해부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의 기술적인 무구(無垢)함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적'이라는 말로 외공으로만 치닫고 내공이 허약함을 은연 중에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내공의 허약함을 꿰뚫어 보았던 플레쉬 조차도 하이페츠의 톤이 창출해내는 마력을 인정하면서 "그의 톤에는 고귀함과 마술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실토했다.
야사 하이페츠는 리투아니아의 빌라에서 1901년 2월 2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왔으나, 사실은 1899년생이었음이 근래에 밝혀졌다. 자식을 신동으로 내세우려 했던 아버지가 자식의 나이를 몇살쯤 줄이는 것은 오랜 동안 관례가 되어왔으므로, 빌라 교향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하이페츠의 아버지도 그런 전통에 따랐을 뿐이다. 그런데 그 소박한 아버지의 허영심이 19세기 태생의 아들을 20세기의 주민으로 이적시켜버린 것이다.
이 2년의 오차는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해도 하이페츠의 생애에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1917년 16세 때에 뉴욕을 정복했던 것으로 되어 있는 기록을 비롯해서 모든 연보에 2살이 덧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1912년 니키쉬가 지휘한 베를린 필과의 협연은 11세 때가 아니라 13세 때로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 살 때'에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따위는 이른바 '신동의 기록'에 연연치만 않는다면 별로 대수로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이페츠야말로 한 때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는 점이며, 거의 모든 바이올린 지망생들이 하이페츠를 우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이페츠를 제처놓고는 20세기의 바이올린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이올린의 신'이니 '완벽의 화신'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환상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슬픈 일이다. 만일 하이페츠가 완벽하다고 한다면 완벽이야말로 모든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기피해야 할 가중스런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페츠의 비극은 그가 음악을 무슨 단거리 경주로 착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는 데 있다. 1930년 런던의 퀸즈 홀의 독주회에서 파가니니의 무궁동을 그가 연주했을 때 비평가 한 사람은 옆자리의 친구에게 "숨이 막힐 지경이군, 그렇지만 저런 스피드로 끝가지 갈 수야 없 겠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페이스가 끝까지 지속되었다.
무궁동과 같은 기교적인 작품을 연주시간의 기록을 경신하는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C장조처럼 깊이 침잠해야 할 작품에서 조차 그는 겉을 핥으면서 치달아가기에 여념이 없다. 1935년의 녹음에서는 2분 53초였던 연주시간이 1952년에는 2분 37초로 단축되었다. 기록을 무려 16초나 경신시킨 것이다.
다행한 것은 하이페츠의 연주가 기록경신만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추락 속에서도 그는 이따금 빛나는 날개를 감추고 있다. 바흐의 라르고 처럼 우리의 심금을 깊이 울려줄 작품을 어찌 이리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그런 불안을 느끼면서도 미묘한 음색으로 우리를 매혹시키는 그 주술적인 톤의 마력에는 누구나 감전되고 만다.
하이페츠는 무한한 침잠으로 우리를 유도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열면 열수록 더욱 많은 문이 닫혀져 있을 것 같은 신비의 세계가 그에게는 없다. 그것이 하이페츠의 공허함이다. 그러나 그 공허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취하게 하는 그 어떤 것이 하이페츠에게는 숨겨져 있다. 내용상의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걸치고 있는 톤의 아름다움은 이따금 '그지없이 그윽한 그리스풍의 우아함'에 견주어지기도 한다.
감칠 맛이 넘치면서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대신 담담한 포장으로 감싸고, 관능적인 전율조차도 냉냉함 속에 묻어 두고 있는 하이페츠 톤의 미묘한 매력은 셍 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트리치오조, 비예니아프스키의 협주곡 2번 d단조 등에서도 빛난다.
하이페츠의 연주를 들으면 등골이 오삭해질 만큼 한기를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냉냉함이야말로 외공의 견줄 바 없는 고수가 그 정상의 고독 속에서 단련한 그의 비급이며, 그 냉기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을 얼어붙게 했던 그의 마력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하이페츠로부터 기대해서는 안된다. 연주계에서 내공의 고수란 참으로 드물기 때문이다.
글. 이순열(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