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nio Morricone (엔니오 모리꼬네)

영화음악은 토키 이후 헐리우드와 유럽영화 사이에서 마치 주제와 변주처럼 들렸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오케스트라 편성, 서로 다른 음악적 컨텍스트, 서로 다른 편곡들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화음악만은 '어쩔 수 없다는듯이' 영화의 내러티브와 주인공에게 복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저항이 시작되었다. 영화가 모더니즘을 통과하고 카메라가 자의식을 얻기 시작하자 영화감독들은 영화 텍스트 바깥으로부터 음악을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재즈 뮤지션들은 영화를 보며 녹음실에서 즉흥연주를 하였고, 로큰롤 가수들이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등장한 것은 정확하게 이 지점이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음악의 고다르였다. 그로 인해 일순간에 전통은 사라졌고, 새로운 사고가 생겨난 것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헐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와 멜러 드라마, 60년대 마카로니 웨스턴과 싸구려 포르노그라피들에 이르기까지 30여년 동안 360편이 넘는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다. 전성기에는 1년에 스무 편의 영화음악을 만든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작주의와 그가 작곡한(음악적 완성도와 관계없는) 실패작들, B급 영화, 마카로니 웨스턴, 심지어 포르노만을 가지고 엔니오 모리꼬네를 대중적인 영화음악가로 평가하는 것은 서투른 이해이다. 1928년 11월 10일 로마에서 태어난 엔니오 모리꼬네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이름난 현대음악가 고프레도 페트라슈에게 사사받은 정통파 음악가였다. 그는 12음계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매끄럽고 매력적인 멜로디를 바탕으로 불협화음을 연출하는 대위법의 편곡술을 익혔다. 현대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고 그의 스승들은 모리꼬네를 격려하였다. 그러나 영화감독 셀지오레오네(Sergio Leone)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바뀌었고, 엔니오 모리꼬네는 '장난 삼아' [황야의 무법자]를 작곡하였다(64년 이 영화의 초판 자막에는 그의 이름이 영어 '가명'인 레오 니콜스로 올라온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지나치게 성공했고 엔니오 모리꼬네는 이렇게 '영화음악가'가 되었다. 이 시기 엔니오 모리꼬네는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이단적 장르에서 전기 기타와 남성 코러스 또는 타악기군, 단 한 대의 피아노, 동요, 가사 없는 허밍, 휘파람 소리 같은 영화음악의 터부들을 차례로 돌파했다. 대부분 그것은 일종의 유머처럼 보였고, 놀랄 만큼 이미지의 감정을 증폭시켜주었다. 또한 모리꼬네는 셀지오 레오네가 헐리우드 웨스턴 영화를 시종일관 좌파의비판적인 시각으로 탈신화화하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모리꼬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음악 장르를 동시에 활용하였다. 하나는 재즈의 리듬이고, 또 하나는 로큰롤의 악기군이다. 60년대 록의 거장들(폴 매카트니, 제프 벡, 지미 페이지, 믹 재거, 프랭크 자파, 루 리드, 마티 볼린, 시드 배럿, 로버트 플립)이 엔니오 모리꼬네의 열광적인 팬이었다는 사실이나, 또는 80년대 현대 재즈의 천재 존 조온이 모리꼬네 영화음악으로 새로운 재즈를 창조해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리꼬네는 영화음악적으로 '68년 세대'에 속한다. 그의 선배인 니노 로타(Nono Rota)가 카톨릭 신자(페데리코 펠리니)나 보수주의자들(르네 끌레망)과 작업하는 동안 모리꼬네는 대부분 좌파 감독들 아니면 진보주의자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공산당원이었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알제리 전투]의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그리고 엘리오 페트리(Ellio Petri)와 따비아니 형제가 모리꼬네의 동반자들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음악이나 혁명가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철저하게 부르주아들의 유산으로서의 고전음악(특히 바흐와 모차르트, 베르디)을 패로디했으며, 제3세계 민속악기들과 민중가요를 채보하고, 이탈리아 각지에 흩어진 농민들의 노래를 연구하면서, 애초 그의 관심이었던 현대음악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엔니오 모리꼬네는 68년이 실패하고, 동지들이 차례로 변절하고, 헐리우드가 유혹해오면서 가야할 길을 잃었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날카로운 유머와 단순한 선율, 악기들 본래의 이데올로기적 기계장치 속성에 대한 성찰에 넘치는 60년대와 결별하며 그는 70년대로 진입하였다. 동시에 진보주의자 모리꼬네는 죽었고, 그 대신 우리는 실험에 빠져든 모리꼬네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70년대에 거의 모든 음악적 도전을 시도했고, 그러면서도 거의 기적적으로 대중성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 모리꼬네 영화음악의 미스테리이다. 그의 악보는 점점 복잡해졌고, 마치 정신분열증에라도 빠진 것 같은 미분화된 선율을 들려주는가 하면, 아주 통속적인 멜로디로 멜러드라마의 감상주의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모리꼬네는 때때로 스스로를 패로디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80년대에 중세 종교음악과 파이프 올갠에 대한 관심, 오보에를 중심으로 한 관악기에 대한 재배치, 그리고 모테트 음악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던 것은 분명 변화이다. 20년에 걸쳐 이루어진 '옛날 옛적 3부작'([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 [옛날 옛적에 혁명은(Once Upon A Time In The Revolution)], 그리고 [옛날 옛적 미국(Once Upon A Time In America)])은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기나긴 이정표이다. 아이러니와 유머, 장르에 대한 풍자정신, 서로 다른 음악적 전통을 가진 선율 사이의 불협화음, 그리고 그가 존경하는 스트라빈스키에게서 영향받은 듯한 야수성, 여기에 록 밴드나 재즈 잼 세션에 가까운 편성으로 음악을 만들던 모리꼬네가 점차 오케스트레이션과 화성, 정교한 대위법과 섬세한 멜로디 사이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엔니오 모리꼬네는 무엇보다 영화음악을 화면에서 그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의 자의식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그는 선율보다는 음색, 멜로디보다는 악기군의 의미론적 컨텍스트를 더 중요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중요한 것은 모리꼬네에게서 영화음악은 비로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읽어야 할 하나의 코드가 되었고, 영화가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로 20세기를 맞이했던 에이젠슈테인과 프로코피에프가 꿈꾸었던 이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룬 것은 68년 세대였던 이탈리아의 셀지오 레오네와 엔니오 모리꼬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