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헝가리인들로 발원된 현악사중주단으로 처음에는 에밀 하우저(Emil Hauser), 임르 포가니이(Imre Poganyi), 이스티안 이폴리이(Istyan Ipolyi), 그리고 해리 손(Harry Son)으로 단원 모두가 창단 전 부다페스트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1917년 첫 콘서트를 열었으며, 곧바로 명성을 얻으며 모차르트와 바르톡으로 연주곡목을 확장시켰다. 1920년대 유럽 순회연주동안, 바르톡의 제1사중주, 스메타나의 e단조 사중주등이 그들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세련된 앙상블과 감정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멤버도 많이 바뀌었다. 1927년 요셉 로이스만이 제2바이올린에 합류하며 이후 이 단체의 리더가 되었다. 1930년대 초기 이폴리이가 알렉산더 쉬나이더로 바뀌고 알렉산더의 형제인 미샤 쉬나이더 역시 손을 대체했다. 그리고 보리스 크로이트가 1936년에 비올라로 합류했고, 이제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단원 모두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인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부다페스트라는 이름은 계속 유지하기로 하였다. 단원의 변화는 연주 특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리더가 하우저에서 로이스만으로 바뀌자 연주변화도 급속도로 바뀌었다. 하우저는 이미 전통있는 바이올린 학파 출신답게 비브라토의 사용이 빈번했으며, 포스타멘토는 자유롭게, 그리고 리듬감도 급하게 잡지 않았다. 반대로 로이스만은 당시 신세대 바이올린 선두주자답게 보다 빠르며 지속적으로 비브라토를 사용했고, 리듬감은 다소 효율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로이스만 이후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음반 레코딩에서도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에서의 커다란 성공 이후에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1938년 미국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1962년까지 미국 워싱톤의 국립 미의회 도서관에 상주하면서 매년 20여회의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1962년부터는 버팔로 소재의 뉴욕 주립 대학으로 상주지를 옮겼다. 이 기간동안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세계 연주여행을 계속했으며, 특히 베토벤의 사중주곡의 해석으로 정평이 나기 시작했고, 매해 이 사중주의 전곡을 연주했다. 그래서 정확히 세번 이 곡을 녹음했다.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때론 협연으로 밀톤 카팀스(Milton Katims) 가 자주 참여했고, 1955년 이후에는 워터 트램플러(Walter Trampler)가 그랬다.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1967년 마지막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이후 미샤 쉬나이더의 병세 악화와 그해 로이스만과 크로이트가 차례로 병에 걸리면서 이 단체는 해체의 운명을 맞았다. 결국 로이스만은 1969년에 예순 여덟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하게 되고, 같은해 크로이트는 일흔 두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다른 두명의 멤버는 계속 학교에 남아 후배를 양성했다. 해체전 30년동안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은 최고의 비평적 찬사와 돋보이는 대중적 성공을 거뭐진 최고의 단체가 되었다.
부다페스트 사중주단(1917-1967)
제 1바이올린 : 에밀 하우저 (1917-1932)
요셉 로이스만 (1927-1932)
제 2바이올린 : 알프레드 인디그(1917-1920)
임르 포가니이 (1920-1927)
요셉 로이스만 (1927-1932)
자크 고로데츠키 (1932-1933)
알렉산더 쉬나이더 (1933-1944 & 1955-1967)
에드가르드 오르뎉베르크 (1944-1949)
비올라: 이스트반 이폴리이 (1917-1930)
보리스 크로이트 (1930-1967)
첼로: 해리 손 (1917-1930)
미샤 쉬나이더 (1930-1967)
세계 초연
밀하우드: 콰르텟 11번(1942) 콰르텟 12번(1945), 콰르텟 14번(1948), 콰르텟 17번(1951)
헌정곡
바르톡 : 콰르텟 5번(1934)
힌데미스 : 콰르텟 5번(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