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iamino Gigli (베냐미노 질리)

‘우리는 테너를 찾았다’. 1914년 파르마 국제 콩쿨의 결과에 따라 이제 갓 24살이 된 베냐미노 질리에게 그 1등상이 수여되자 마침내 유럽은 진정한 테너를 갖을 수 있었다. 카루소가 전성기를 미국에서 보내는 동안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뛰어난 테너를 이태리는 필요로 했던 것이다. 1890년 이태리 레카나테에서 구두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질리는 로마의 유서깊은 산타 세실리아 리세오 음악원에서 장학생으로 음악공부를 했다. 파르마 콩쿨의 우승은 질리로 하여금 몇 년안에 오페라 세계의 정상에 진입하도록 하는 직선계단 역할을 했다. 1914년 11월 5일 이태리 로비고에서 라 지오코다 La Gioconda의 엔조역으로 프로 데뷔를 한 이래 이태리의 모든 극장이 그의 출연을 원했다. 나폴리(1915년 메피스토펠레의 파우스트, Faust in Mefistofele), 로마(1917년 마스카니의 새로운 로도레타의 플라멘, Flammen in Mascagni's new Lodoletta), 밀라노(1918년 토스카니니의 지휘하래 다시한번 파우스트) 그리고 1919년 처음의 투어를 남미로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 카루소에게는 황혼의 커튼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성탄전일, 질리의 데뷔 4주만에 카루소는 마지막 공연을 하고 있었고 공연 직후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 다음해 5월에 이태리로 돌아가 사망했다. 카루소의 사망이후 질리에게 드리워졌을 법한 카루소의 그림자 영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위대한 테너의 낭만적 역할을 잇는다는 부담감 없이, 질리는 불과 몇 절기안에 스타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세울 수 있었다. 질리의 뉴욕 데뷔(보이토Boito의 메피스토펠레)에 대해 미국인들의 입장을 대변한 막스 스미스(Max Smith)는 “질리의 목소리는 특별한 따스함과 달콤함을 지닌 서정적 테너의 바로 그것이며, 힘과 중량감이 느껴진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음색자체의 아름다움이 주목할 만하다. 낮은 음에서의 탄력과, 정교함도 매력이지만 고음역에서 일반적으로 차분한 감에 비춰볼때 힘차게 내질러야 할 때의 관능미는 특히 두드러진다. 그의 목소리 자체는 오히려 뉴욕 시민들이 일찍이 카루소에서 듣던 드라마틱한 강렬함이나, 감각적인 생동감이나 표현력등에서 오히려 더 두드러진다” 라고 평했다. 스미스의 이러한 인지적인 요약은 미국에서의 그의 활동과 최소한 그 이후의 십여년간의 질리의 목소리의 성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러한 이 평가는 지오바니 마르티넬리(Giovanni Martinelli)나 후의 지아코모 라우리-볼피(Giacomo Lauri-Volpi)의 굳건한 보이스나 나중의 메트로폴리탄 가수들이 터득한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고음역과 날카로운 음의 선정력은 질리가 아니였으면 전수되지 않았을 테크닉이었다. 질리는 미국에서 상륙하여 자신의 레파투와속에서 19개의 배역을 소화했고, 메트로폴리탄 시즌에는 더 많은 역을 소화해야만 했다. 질리는 1932년 한 언론과의, 그가 받는 봉급에 대한 시비로, 간간한 두통과 이어지는 우울증으로 메트로폴리탄을 떠났고 만다. 질리는 1939년에 몇 차례의 공연 때문에 다시 컴백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이태리로 돌아가 1940년대의 자신의 경력을 쌓는다. 이 시기에 질리는 주로 자신을 주역으로 하는 전곡 오페라 레코딩에 참여했다. 질리를 잃었던 미국인들은 1955년에야 그의 마지막 작별 공연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후 1957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질리는 자신을 ‘국민 가수’라 여겼다. 그는 확실한 열정으로 대다수의 대중을 즐겁게 하려고 애썼고, 실제로 그들을 위해 많은 연가와 대중적인 레파토와를 자신의 공연과 음반에 담았다. 이와 관련하여 질리의 목소리가 이 세기에 어느누구나가 인정하는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중 하나였다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그의 테크닉이 60대에서도 확실하게 증명되는 강인한 체력에 기인한다. 그가 연기할 때 항상 좋은 면만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 그의 연기력은 그의 노래에 비해서 조금은 약하다는 평가 - 그가 청중과의 교감에서는 독특한 기질을 발휘한데서 그의 은막으로의 진출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질리는 다른 여타의 테너들에 비해 레코딩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편으로 1918년을 시작으로 40여년 동안 총 370여차례의 레코딩을 남겼다. 레코딩의 잦은 녹음은 그의 인기 비결을 가늠케 하는데 동시에 영화출연에서도 1935년부터 41년사이 그의 15편의 영화중에서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최고의 전성기 시절을 보냈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 선보이는 두장의 앨범 역시 수많은 질리의 녹음중에서 이태리와 독일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전성기의 질리의 모습을 엿볼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젊은 시절의 영광을 담은 최고의 몇 안남은 녹음만을 뒤로 한 채 그의 전설은 우리시대의 감각에 호소하는 마지막 아름다운 미성의 테너는 사라져 가고 있다. - 정리 이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