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트뱅글러는 음악사적으로 낭만주의 말기인 1886.1.25, 베를린의 교양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돌프는 음악을 사랑한 유명한 고고학 교수였고, 어머니 아델라는 화가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그가 태어날 당시 53세의 브람스는 바그너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거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26세의 청년 말러가 니키쉬 아래에서 지휘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7세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고 8세인 1894년, 뮌헨으로 옮겨 안톤 반브룬, 요제프 라인베르거, 막스 폰 실링스에게 음악교육을 받았다. 처음 그의 목표는 작곡가였다.
17세되던 1903년에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했던 그는, 18세의 나이에 이르면서 지휘로 방향전환을 한다. 뮌헨에서 있는 한 연주회에서 우연히 대리 지휘자로 나섰는데, 그 반응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6년 뮌헨 카임관현악단에서 지휘자로 공개 데뷔한다. 취리히 시립 가극장, 뮈헨 궁정 가극장, 슈트라스부르크 가극장을 거치면서 그의 실력이 점점 인정 받기 시작했다.
25세 때의 뤼벡 가극장 지휘를 맡으면서 그의 지명도는 급속히 높아 졌고, 1917년 29세의 나이로 만하임 궁정 가극장의 지휘자에 앉으면서 그는 가장 총망받는 젊은 지휘자로 꼽히게 되었다. 바로 그 해, 베를린 필을 처음으로 객원 지휘하는 기히를 가졌다. 당시 베를린 필을 맡고 있던 니키쉬는 29세의 청년 푸르트뱅글러를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22년 니키쉬의 관찰은 유언이 디어 돌아왔다. 그의 유언에 따라(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와 베를린 필이라는 독일의 정상급 두 오케스트라가 만장일치로 푸르트뱅글러를 추대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베를린 필과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거느린 푸르트뱅글러는 독일음악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아마도 그로부터 1932년까지의 10년간은 베를린 필의 황금기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푸르트뱅글러가 뤼벡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18년 그가 베를린 필에 데뷔 연주를 가지던 그 해에 독일은 무제한 무경고 잠수함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에선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잇달아 일어났다. 비록 다음 해에 1차 대전이 종료되었지만 이것은 더 큰 불행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1922년 그가 베를린 필에 앉던 해에 뭇솔리니가 로마로 진군해서 전권을 장악했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1932년 베를린 필 창립 50주년 기념연주회가 성대히 열리던 그 해에 나치는 독일의 제1당이 되었고, 바로 다음해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히틀러가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세상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음악계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었다. 명지휘쟈 부르노 발터의 연주회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중지 당하는가 하면, 쉰베르크가 작곡가 아카데미에서 해고 되었다. 베를린필 단원이었던 시몬 골드베르크가 역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해고 되었으며, " 화가 마티스" 발표를 기점으로 힌데미트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고 마침내 힌데미트는 대학 강단에서 끌어내려 졌다.
이 모든 문제에 푸르트뱅글러는 적극 개입하여 격분했고, 항의했고,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교묘한 형태로 푸르트뱅글러의 존재를 이용했다.
1933년 7월, 푸르트뱅글러는 괴링에 의해 프로이센 추밀원의 고문관에 임명되었다. 물론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1934년 12월, " 힌데미트 옹호사건"으로 베를린 필을 사임해 버린 푸르트뱅글러는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 지휘자로 추천했다. 그러자 나치는 급히 푸르트뱅글러를 베를린 필 지휘자로 추대했다. 정치적인 시끄러움을 싫어한 푸르트뱅글러는 이를 수락하여 뉴욕 필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푸르트뱅글러가 나치에 항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미국 음악계는 푸르트뱅글러에게 " 어용음악가 "라는 딱지까지 붙였다.
나치는 순수 게르만인 푸르트뱅글러를 철저히 선전도구로 이용했다. 전쟁이 종장으로 치닫는 1942년 4월에는 히틀러 탄생 전야제의 축하 연주까지 담당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즈음 푸르트뱅글러의 행동은 언제나 게슈타포의 감시하에 있었고 당연히 모든 전화가 도청되었다. 독일이 패하기 2년전, 푸르트뱅글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단신으로 스위스로 망명했다. 끊임없이 그를 감시하던 게슈타포의 눈을 피해 호텔을 탈출한 것이다.
푸르트뱅글러는 독일인을 아꼈고, 그들이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은 자신의 음악을 필요로 한다는 신념을 최후까지 갖고 있었다. 실제로 전쟁 중의 독일인들에게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처럼 큰 위안은 없었다. 푸르트뱅글러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남긴 글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 당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매번 최후의 연주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항상 헌신적으로 연주에 임했다. 청충 역시 유별났다. 그들은 폭격으로 파괴된 잿더미를 넘어서 찾아왔다. 1943년 이후가 되면서 연주회는 공습 때문에 자주 중단이 되었다. 당시 나는 연주회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 어젯밤은 괜찮았어요? ' 라고 말을 걸었다. 그는 말했다. ' 아니오, 어젠 폭격으로 인해 집이 다 타 버렸어요. 하지만 이럴 때에 푸르트뱅글러의 연주를 들으러 오는 일 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
전쟁 후, 모스코바 태생의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가 살아남은 베를린 필 단원들을 끌어모아 연습을 시작할 때, 그들은 이렇게 목표를 설정했다. " 지금은 행방불명이지만 언젠가는 꼭 푸르트뱅글러가 돌아온다. 돌아올 그에게 가장 좋은 상태로 바통을 넘겨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푸르트뱅글러는 " 친나치 " 라는 죄목으로 고발되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연주 금지를 명받았다. 당시의 심의 법정에서 어떤 증인이 한 말이 전해온다. " 제3제국 지배하에 있던 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 준 사람은 오직 푸르트뱅글러뿐이었다. 그의 연주회가 있는 한 절망할 수 없었다."
1947년 5월 25일, 비나치 심리 결과 무죄가 인정된 푸르트뱅글러가 베를린 필 지휘대에 돌아왔다. 전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었지만 커피나 담배, 심지어는 구두까지 팔아서 연주회장으로 몰려들었다. 마침내 " 타티아나 팔라스트 " 무대에 푸르트뱅글러가 다시 섰다. 오케스트라가 환희에 찬 얼굴로, 신을 모시듯 일어섰으며 청중들의 열광은 극에 달했다. 그의 귀환을 알리는 곡은 역시 베토벤이었다. 에그몬트 서곡에 이어 교향곡 6번 '"전원" 과 5번 " 영웅 " 이 울려퍼졌다. 연주가 끝나도 청중들은 홀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1951년, 푸르트뱅글러는 다시 상임지휘자로 복귀했다. 65세의 노지휘자에게 마침내 밝은 세상이 찾아왔지만 이미 그는 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었다. 52년 짤스부르크의 연주 도중에 발병한 폐렴과 항생제 부작용으로 이어진 청각장애가 그를 자래에 눕게 했다. 1954년 다시 지휘대에 올라섰으나, 그 해 9얼 20일에 있은 자작 교향곡 2번과 베토벤 교향곡 1번을 끝으로 병상에 옮겨졌다. 11월 30일, 거인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