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아비니는 이태리 테너 중에서 질리와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음성을 지닌 테너로 불린다. 녹아 내릴 듯한 아름다운 미성과 가성에 가까운 도취적인 음색을 들려 주었던 레지에로 테너 페루치오 탈리아비니는 1913년 이탈리아의 레지오 아밀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음악가가 되기보다는 안정된 기술자가 되기를 더 원했다. 결국 탈리아비니는 파르마 음악원까지 졸업하고 나서도 아버지의 간청에 다시 공부하여 전기기사의 자격증도 획득했다.
그는 1938년 피렌체의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같은 해 플로렌스의 Comunale에서 <라 보엠>의 루돌포 역으로 데뷔했다. 이 공연은 성공을 거두어 '스키파의 재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 39년에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 41년에 제노바의 카를로 펠리체 극장, 41년에 로마 오페라 극장, 42년에 라 스칼라 극장으로 입성하는 등 그의 성공은 화려했다. 이 무렵 그가 장기로 했던 레퍼토리는 베르디의 <리골레토>, 마스카니의 <친구 후리츠>, 칠레아의 <아를르의 여인>,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람메르모르의 루치아>, 벨리니의 <몽유병의 여인> 등 이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이탈리아의 테너'로서 전선을 다니며 병사들을 위해 노래했으며, 라디오에서도 그의 노래를 방송해 연합군들까지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는 46년에 남미로 건너가 크게 성공했다. 남미의 승리를 발판으로 47년에 드디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데뷔, <라 보엠>으로 성공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인기는 승승장구하여 당시의 인기 소프라노 피아 레첼로와 결혼했다. 50년대에는 최고의 기량과 명성을 떨쳤고 영화 <물망초>등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칼라스와의 파트너쉽으로 스테파노가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다소 밀려나기 시작했다. 델 모나코, 베르곤지, 코렐리 등도 그의 인기를 뺏어갔지만 무엇보다도 그와 비슷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는 스테파노의 성공은 그의 입지를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구나 탈리아비니는 레퍼토리의 폭도 그들보다 좁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탈리아비니는 고수한 우아하고 정교한 창법으로 개성있는 좋은 연주를 남겼다. 그의 성량은 큰 편이 아니었으나 팽팽한 포르테와 피아니시모가 대조적이며 맑고 투명한 고음을 들려 주었다. 특히 그는 가성에 가까운 발성을 통해 도취에 가까운 교묘한 감정의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스키파의 뒤를 이은 가장 뛰어난 레지에로의 테너였다.
그는 70년대 이후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했으며, 오래 살았지만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83년에 있었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100주년 기념식에 초대받고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운 음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워대던 애연가였다. 결국 1995년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