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선 인간이어야 한다. 예술이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인간으로서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해야 할 일은 인류의 복지를 염원하는 일이었다. 세계 평화에 대한 나의 기여는 보잘 것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념에 대해서 온갖 힘을 다할 것이다." - 파블로 카잘스
파블로 카잘스는 "연주가의 시대" 라는 20세기에 우뚝 솟은 위대한 산맥이다. 그로 하여금 이전의 첼로 연주가 집대성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이후의 모든 첼로 연주의 흐름이 갈라져 나왔다. 카잘스는 첼로 연주사상 최대의 인물일뿐만 아니라 고향이 같은 피카소와 병칭되는 금세기 예술계 굴지의 거인이다.
카잘스는 187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쪽에 있는 카타로니아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음악가여서 카잘스는 열한 살까지 오르간과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그 다음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첼로를 배웠다.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에 간 카잘스는 벌써 뛰어난 연주가였다. 아직 어렸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하여 댄스며 음악 공연을 하는 카지노에서 연주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카잘스의 연주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은 스페인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를 왕궁에 초빙하여 연주를 하게 하였다. 그 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그를 초빙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호세 가르시아에게 사사 받았으며 마드리드 음악원을 나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200여년 간이나 잠들어있던 바흐의『무반주 첼로 모음곡』악보를 거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첼로가 지니고 있는 깊은 표현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바로크 음악의 정수인 이 곡에 대한 카잘스의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13살이란 어린 나이로 이 곡을 발견한 카잘스가 공개적으로 연주한 것은 그로부터 12년이란 세월이 흐른 25세 때였다. 그는 그 동안 이 곡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곡을 발굴한 지 47년, 공개로 연주한 지 35년이 지난 1936년, 그의 나이 60살 때에서야 비로소 녹음을 했다는 점이다.『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래서 1936년부터 39년까지 3년 동안에 녹음되어 발매되었다.
가르시아의 지도로 첼로를 익히기 3년만에 그는 벌써 스승을 능가하는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99년 프랑스의 지휘자 라무르의 독주자로 데뷔하면서부터였다. 그후 1919년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약 10년 동안 활약하다가 1936년 스페인에 내란이 일어나자 자선 음악회를 유럽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1939년 조국의 프랑코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피레네의 외진 마을 프라도에 은둔했는데, 그 후 10년 동안 음악에는 아랑곳없이 프랑코가 다스리는 스페인에 피난해오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10년 동안은 그의 첼로 연주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1974년 어느 날,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절대로 첼로를 연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이 고장에서는 이윽고 그를 흠모하여 모여든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한 음악제가 탄생했다.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바흐의 대가"인 카잘스를 위한 모임이 발족되어 프라도에서 축전을 열었다. 바이올린의 왕이라고 불리는 크라이슬러를 비롯하여 역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과 시게티, 그리고 피아니스트 제르킨과 같은 세계 일류 연주가가 이 자그만 도시 프라드를 찾아온 것이다. 이 프라드의 음악제는 카잘스가 어머니의 고향 푸에르토리코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여 옮겨 갈 때까지 매년 베풀어졌다.
카잘스가 푸에르토리코로 옮긴 뒤 푸에르토리코 정부에서느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협력으로 카잘스 음악제를 베풀기로 하였다. 수도 산판에서 열리는 음악제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성황을 이룬 것은 두말할 것 없다. 그는 독주자로서도 많은 연주회를 갖고 페코드도 녹음했지만 프랑스 사람인 피아니스트 코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티보와 함께 트리오르 만들어 활약했다. 이 트리오는 세계에서 음뜸 가는 것이었으나 티보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코르토는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뒤에는 홀로 남아 활동해야 했다.
만년은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으로 이주, 100년에 가까운 생애를 그곳에서 마쳤다. 양심의 소리에 따르는 강하고 의연한 생활 자체가 그대로 더없이 훌륭한 예술의 경지와 결부된 보기 드문 인물이다.
파블로 카잘스가 아흔다섯살이었을 때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는 활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왜냐 하면 지금도 제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