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의 왕' 크라이슬러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명으로 1875년 2월 2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서 1962년 1월 29일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정성스런 교육에 의해 발굴되어졌는데, 6살 때부터 Jacob Dont의 밑에서 공부했으며 이듬 해 빈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여 Jacques Auber와 Hellmesberger에게 음악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1885년 빈 콘서바토리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그는 다시 파리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여 Massart(바이올린)와 Delibes(작곡)에게 음악을 배우게 된다. 그는 1887년에 4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이 음악원을 그랑프리(수석)를 수상하며 졸업한 후 1888년 뉴욕의 스타인웨이 홀에서 데뷔연주회를 가지고, 다음 해에는 모리츠 로젠탈과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매우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빈으로 돌아온 크라이슬러는 몇 년간 음악에서 떠나, 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로마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오스트리아 군에 입대하여 유명한 창기병 연대(Uhlan regiment)의 장교로 복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1899년 베를린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다시 무대에 서서 당시의 음악계에 센세이션한 반응을 만들어냈는데, 초인적인 기교와 더불어 토박이 빈 음악가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음색과 탁월한 곡 해석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00년에서는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독주자로서의 활동 외에 호프만(Hoffman), 제라디(Gerardy)와 함께 실내악 활동을 했었으며, 영국에서는 1904년 그에게 런던 필하모니 협회에서 베토벤 금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생하자 그는 이전에 몸 담았던 창기병 연대에 재입대하여 복무하다가 그해 9월 6일 렘베르크에서 러시아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어깨와 엉덩이에 부상을 입고 제대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의 부상은 심각한 것은 아니어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활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는 이후 1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거의 전범취급을 받다시피 하면서도 미국에 머물러 음악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유럽으로 건너가서 1938년 프랑스 시민권을 얻기도 했지만 계속적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연주하였고 1940년 미국에 정착하여 1943년에는 뉴욕의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그는 과르넬리의 바이올린을 사용하였으며, 17세기 이후에 작곡된 거의 모든 바이올린 작품들을 레퍼토리로 삼았다. 그는 1949년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쇼송의 '시곡' 오리지널 악보를 기증받기도 하였다.
크라이슬러는 어린 시절 유복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대단히 관대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진이나 그림으로 남아 있는 그의 얼굴모습만으로도 따뜻한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것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으며, 그가 가업인 의사를 포기하고 음악을 계속하게 된 것도 '보다 많은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그러한 크라이슬러의 성격은 그가 남긴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또한 그의 연주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의 그의 따듯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