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코르토는 프랑스인을 양친으로 스위스 니용에서 출생. 어린 시절 파리로 이주, 쇼팽의 제자였던 에밀 데콩브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이어 파리 음악원에 입학, 루이 디에메르의 클래스에서 수학했다. 당시 그는 정규 학교 수업 외에 성악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 가운데 도 시와 비극은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한다. 디에메르의 클래스에서 1등상을 받은 코르토는 다음 해 콩세르 콜롱에 독주자로 데뷔하지만, 곧 연주 활동을 중단하고 바이로이트로 떠나고 만다. 바그너의 악극에 완전히 빠져 버린 그는 그 곳에서 저명한 지휘자 한스 리히터로부터 지휘를 배웠으며, 반프리트에서는 리스트의 딸이자 바그너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와 친분을 맺으면서 리스트의 작품을 깊이 연구하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코르토는 바이로이트에서 들이마신 바그너의 광기를 본격적으로 토해내기 시작한다. 바이로이트의 차석 지휘자의 신분으로 오페라 페스티벌 협회를 결성, 파리에<신들의 황혼>의 초연을 했으며, 이어<트리스탄과 이졸데>도 무대에 올려 직접 지휘를 맡았다. 그의 바그너 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서 바그너 전작품의 총보를 완벽히 암기, 필요할 때면 즉석에서 피아노로 연주해 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코르토에게 있어 바그너는 신 그 바체였다.
1904년 코르토는 '소시에테 데 콩세르 코르토'라는 단체를 설립해서 젊고 불우한 작곡가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으며 이듬해에는 자크 티보,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 1944년까지 무려 39년 동안 실내악 활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데, 이것은 후일 그의 피아노 해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실내악 연주를 통해서 피아노를 '노래'하게 하고 거친 음향을 정제하게 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1918년 프랑스 정부 대표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코르토는 이듬해 파리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를 창설해 직접 원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지크 티보, 파블로 카잘스, 마거리트 롱, 반다 란도브스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최고의 음악인들을 교수로 초빙해서 명실 상부한 최고의 음악 교육기관으로 급부상 한다. 이외에도 그는 1928년 파리 오케스트라의 창설에도 깊이 관여하는 등 실로 행동하는 음악인의 표상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다.
그러나 세계 제2차 대전은 그의 명성에 결정적인 오점을 남기고 만다. 나치와의 관계가 문제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것이다. 청중들은 그를 예전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았고, 그 역시도 이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스위스의 로잔느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팬들의 차가운 시선은 1947년 열렸던 파리 콘서트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뒤로 하고 코르토는 다시 한번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1949년 개최된 쇼팽 서거100주기 기념 콘서트를 계기로 이러한 비난도 점차 수그러지게 된다. 이후 과거와 다름없이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잊혀진 명성을 완전히 되찾을수는 없었고, 1962년 스위스 로잔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코르토의 피아노 연주는 예리한 리듬감과 심하다 싶을 정도의 루바토를 특징으로 한다. 아무리 20세기 초반의 피아니스트가 주관적인 해석에 치중했다 하더라도 그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주를 높이 평가하고있는 것은 기교를 넘어서는 시정, 그리고 그 이면에 담겨 있는 정확한 논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이러한 코르토의 특성이 가장 잘 담겨있는 것이 바로 그가 남긴 일련의 쇼팽 음반들이다. 특히 왈츠집과 전주곡집은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진 명반으로서 코르토 예술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좋은 음반들이다. 아마도 유명 피아니스트 가운데 그만큼 미스 터치가 많은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것은 피아노를 연주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연주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줄 아는 청중이 있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