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라펠리는 1908년 1월 26일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철학교수로, 그는 유복한 환경 속에서 일찍부터 음악을 배웠지만, 1920년대 유럽 전역에 불어닥친 대공황 앞에서 생존을 위한 빵과 생활을 위해 파리의 클럽과 극장을 전전해야 했다. 무성 영화의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19세 때, 그는 루이 암스트롱과 조 베누티의 협연에 깊은 감화를 받고, 재즈와 바이올린을 자신이 나아갈 방향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클래식 악기인 바이올린으로 재즈를 연주하면서 그는 숱한 조소를 감내해야만 했다. 1929년 그는 자신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귀인을 만난다. 거리를 떠돌던 다섯 살 연하의 벨기에 출신 집시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다. 서로 의지했던 두 사람은 1934년 핫 클럽에서 ‘유럽 재즈의 효시’라고 칭해지는 핫 클럽 퀸텟(Quintette du Hot Club de France)을 결성한다. 클래식 현악 3중주를 변형시킨 기타 셋, 베이스 하나, 바이올린 하나라는 이채로운 형식의 QHCF는 금세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미국으로 그 위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라펠리는 1939년 프랑스와 QHCF를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지난날의 명성을 회복하지만, QHCF는 1953년 장고 라인하르트가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해체의 아픔을 겪는다. 장고 라인하르트의 죽음과 QHCF의 해체를 겪으며 낙담해 있던 그라펠리는 아픈 상처를 털고 일어선다. 1957년 스터프 스미스·오스카 피터슨·조 존스와의 협연, 1965년 스벤드 아스뮤센과 정다운 바이올린 2중주, 그리고 1966년에는 스벤드 아스뮤센·스터프 스미스·장 뤽 퐁티와 함께 ‘바이올린 서미트’를 결성하여, 재즈 바이올린의 가치를 드높인다. 유럽 최고의 재즈 스타였던 그라펠리는 1969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함으로써 비로소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딛는다. 생을 반추하는 예순하나의 나이. 그러나 그는 신인의 각오로 의욕적인 출발을 한다. 자신에게 바이올린이란 빛을 제시한 조 베누티와의 감격적인 협연, 게리 버튼과 음악적인 교분을 싹틔운 것도 이 즈음이었다. 육순이 넘은 나이에 ‘스윙’이라는 퇴화된 개념으로 뒤늦게 미국을 찾아온 그라펠리는 모두가 새로운 실험과 스타일에 경도되어 있는 동안, 자신이 뜻했던 ‘스윙의 아름다움’을 견지함으로써 1970년대의 간극을 파고든다. 그는 장고 라인하르트의 후계자 디즈 디슬리·마틴 테일러·마크 포세트 등의 젊은 기타리스트와 함께 QHCF의 부활을 꿈꾼다. 1972년 영국 국영 TV에서 만난 바이올린의 거장 메뉴인과 함께 ‘Jalousie’를 시작으로 ‘Plays Berlin, Kern, Porter and Rodgers & Hart’, ‘Plays Gershwin’, ‘Strictly for The Birds’를 함께 레코딩한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이올린 특유의 색감을 자아내는 메뉴인과 현과 활이 닿을 때마다 포근함이 피어나는 그라펠리의 대비, 클래식과 재즈의 이 중후한 결합은 재즈와 클래식의 조화를 논할 때마다 언급되는 기록들이다.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경험했던 1970년대를 마감하면서 그는 장 뤽 퐁티·멜 루이스·얼 하인즈·조지 쉬어링·오스카 피터슨·행크 존스·조 패스 등과의 협연을 통해 한층 확장된 음악 세계를 구가한다. 1980년대에는 장고 라인하르트를 대신할 음악적 동반자 마틴 테일러·마크 포세트와 단정한 조화를 일구는 한편, 보사노바의 새로운 해석, 투츠 틸레망과의 교류를 수확한다. 이후 영화 음악 ‘Milou en Mai’를 작곡, 연주하는 동시에 첼리스트 요요마와 함께 ‘Anything Goes On’, 피아니스트로서의 시도를 담은 ‘My Other Love’를 발표한다. 1990년대, 팔순의 나이에 이른 스테판 그라펠리는 ‘살아 있는 재즈의 역사’로 칭송되지만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맥코이 타이너와의 협연, 도쿄 라이브를 통해 1990년대의 포문을 열면서 1992년 85회 생일 기념작 ‘So Easy To Remember’와 ‘1992 Live’를 발표하고, 프랑스의 영화 음악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미셸 르그랑과 함께 ‘Legrand Grappelli’를 레코딩했다. 1993년 갑작스런 발병으로 잠시 병상에 누워 있던 그라펠리는 이내 무대로 복귀하여 1980년대의 친우 마크 포세트와 ‘Looking at You’를, 마틴 테일러와 ‘Reunion’을 발표하며 팬들을 안심시켰다. 1994년 목 동맥 수술을 받았지만 주위의 걱정을 물리치고 그는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 마틴 테일러의 리더작 ‘The Spirit of Django’에 참가하는 등 건재를 과시했고, 몇 년 뒤의 투어를 계획하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1995년 미셸 르그랑과의 두 번째 작품 ‘Douce France’, 피자렐리 부자의 기타를 넘나들던 ‘Live at The Blue Note’, 그리고 미셸 페트루치아니와의 1996년작 ‘Flamengo’에서의 활력 넘치는 연주를 들으면서 모두들 그라펠리의 건강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라펠리는 1997년 9월 11일 엘리제 궁에서 휠체어에 의지한 채 프랑스 명예 시민의 작위를 수여 받는다. 그것이 공식 석상에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2월 1일, 그라펠리가 탈장 수술의 후유증으로 파리의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듣는 이의 가슴을 훈훈하게 감싸는 달콤한 스윙감.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따스함. 언제, 어떤 형식의 곡을 매만져도 깨끗하게 빚어지는 감동. 스테판 그라펠리의 음악에는 따스한 온기와 진솔한 삶의 향기가 묻어 난다. 삶과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아내는 내면의 연주는 넉넉한 가슴에서 우러나는 그윽한 인간미의 향이었다. 글. 하종욱(재즈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