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비아 이전, 기타는 작은 음량과 인식부족으로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아 살롱음악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고비아의 출현으로 기타는 수 천년 역사 이래 비로소 예술악기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여기 오늘의 세기를 대표하는 두 위대한 예술가가 있으니, 그들은 바로 세고비아와 카잘스다' 라는 크라이슬러의 말이 아니더라도, 세고비아는 기타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그는 음악의 한 장르로서 기타를 정착 시켰다. 기타를 예술적인 연주회의 악기로 올려놓은 것이다. 이제 기타는 다른 악기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독주악기가 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세고비아 연주평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탁월한 연주 능력과 창조정신에 의해 자기 자신의 음악을 잉태시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으나, 세고비아는 그 한 사람에 속한다. 그리고 그는 그 매개체인 악기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 버릴 것처럼 보이는 수가 가끔 있다.' 1987년, 기타 5000년 이래 최고 거장 세고비아를 잃은 후 그 후계자들인 브림, 월리엄스, 디아스, 라고야등은 예전처럼 넋두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고비아 덕택으로 밝은 앞날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인 1893년 태어나 격동의 20세기 말 1987년 6월 3일 94살 나이로 온 세계 기타아인들과 음악인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영면한 세고비아. 그는 분명 금세기 획을 긋는 음악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카잘스(Casals), 피카소(Picaso), 로르카(Lorca), 히메네스(Jim nez)와 같이 스페인 출신의 대가로 꼽힌다. 세고비아가 활약한 20세기의 세계는 제 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큰 시련을 겪었다. 조국인 스페인 역시 내란과 복잡다난한 사회환경과 시대상으로 얼룩져 예술가들의 순수한 넋을 발휘할 환경은 커녕 강압의 스트레스로 나쁜 여건으로 눌렀다. 세고비아 또한, 조국을 16년동안 떠났지만, 결코 잊은 적이나 등진 일이 없었다. 자가당착과 저돌의 무모함 보다는, 기타로 모든 대상을 바꾸어 치환(置換)시킴으로써 음악예술에 더욱 정진했다. 그는 강인한 의지로 끝까지 지켜보면서 진실의 승리를 기원한 현인이었다. 어두웠던 젊은 시절과 흡사한 집시,건달,돈환의 노리개였던 기타를 세고비아는 스페인 심볼이자 세계 공통악기로 바꾸어 놓았다.
전성기인 1924년부터 1960년까지 세계 각지에서의 연주회는 3000회가 넘을 정도로 엄청났다. 끊임없고 지속적인 연주결과는 인정받지 못한 기타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기타를 음악의 독특한 장르에 귀속 정착시켰다. 기타는 다른 악기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독.중.협주악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술악기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세고비아 자신도 빛나는 혜성으로 '기타의 왕' 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얻었다. 이제 인류 역사와, 희노애락을 같이 해 온 기타는 황금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비록 거장은 떠났지만, 그 후계자들은 이제 예전처럼 넋두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고비아의 발없는 그늘이 온 세계를 덮으며, 이 은인 덕택으로 밟은 앞날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아란훼스(Aranjuez)와 건조한 라 만차(La Mamcha)를 지나노라면, 갑자기 광활한 올리브 밭으로 뒤덮여 지는데 이 때 우리는 안다루시아의 하엔(Jaen)에 발을 들여 놓았음을 알게 된다.
세고비아가 태어난 리나레스(Linares)는 하엔에 속해 있는 시(市)이다. 그는 시청 앞 코레데라 거리 64번지에서, 1893년 2월 21일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안드레스 세고비아 토레스(Andres Segovia Tores)인데, 보통 안드레스 세고비아 또는 불어식 발음으로 앙드레 세고비아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목공(木工)으로 넉넉치 못했던 그의 부모들은, 태어난 지 2년만에 큰아버지.어머니에게 양육을 부탁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안 대신 낯설은 큰집에서 막무가내식으로 울어댔던 세고비아를 큰아버지 에두아르도는 다음과 같은 노래로 달랬다고 한다. 세고비아의 <자서전> 1장 앞 머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타를 퉁긴다는 것은
흠!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니다.
흠!
무릎에 힘을 넣고
흠!
끈기있게 해 나가야만 되는 것이다.
흠!
떼보 앞에서 그칠 때까지 노래를 되풀이 했던 큰아버지는 세고비아의 손목을 잡고 '흠','흠'하는 기타 리듬을 흉내 내주었다. 그것은 어린 세고비아에게 매우 강한 기쁨과, 후일까지도 깊은 추억으로써 마음속 깊이 새겨준 최초의 음악씨앗이었다. 또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자라 세고비아의 인생에서 항상 좋은 열매를 거두었다고 강조했다. 10살 되던 해 세고비아는 학교입학 때문에 그라나다로 이사했다. 리나레스에서 삶을 받았다면, 세고비아 인생과 예술의 미적인 배양은 그라나다에서 였다. 중세 아랍풍의 정취가 배여있는 이 도시는 또 알함브라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목들의 잎이 살랑거리는 미풍의 소리와 나이팅게일의 고운 노래와 함께 하모니를 만들고 있었다. 더욱이 기타는 이 도시 정취에 어울리면서 세고비아를 유혹했다. 기타는 서민악기이면서 아름답고 소박한, 또 시적인 울림을 가졌으므로 세고비아가 여기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험난했던 독학은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선생이기도 하며 또 학생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되고 친한 전우의 우정 같았다. 그리고 그 우정의 고리는 평생 고난에 차고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통해 더욱 강해져 갔다.
'가혹한 연습에 견딜수 없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음악인이 못된다'라고 갈파한 세고비아의 말과 같이 그는 15세 때 벌써 바하에서 고전, 낭만, 근대음악에 이르기까지 능숙히 연주할 수 있는 기량을 지녔다. 드디어 1908년 그라나다 아트 센타에서 성공리에 첫 데뷔 후, 곧이어 세빌리아에서도 첫 공개 콘서트를 세고비아는 가졌다. 1912년 마드리드 연주 며칠 전 세고비아는 기타 제작의 명공(名工) 마누엘 라미레스(Manuel Ramirez)로부터 "기타의 영광을 주십시오"란 말과 함께 명기를 선물받았다. 이 황홀한 순간부터 더욱 더 기타의 참된 맛을 터득해, 감미롭고 풍요한 연주를 25년간이나 했으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17년 마드리드 연주회 평을 <무지카>지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리사이틀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아직까지도 이 악기는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평가절하 상태이나, 이 비르투오소(名匠)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음으로 기타 본래의 훌륭한 음악세계를 그려냈다. 연주회날 레퍼터리는 소르의 <요술피리 변주곡>을 비롯해 타레가, 쇼팽, 슈만, 멘델스존, 그라냐도스등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한편 저명한 문필가 리까르도 바에사 역시 '위안을 주는 감정, 풍부한 조화가 잡힌 화음, 그리고 혼을 담은 연주는 매우 만끽된 감동으로 가슴을 두드려 주었다'라고 극찬했다.
1924년에는 빠리 꽁세루바뚜와르홀에서 전고전(前古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연주를 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 연주에서 감명을 받은 루셀은 <세고비아>를 헌정했고, 그 뒤 탄스만, 토로바, 폰세, 테데스코, 빌라-로보스. 로드리고 등의 현대 작곡가들이 기타 작곡의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마넨은 <환상곡-소나타>에서 "세고비아를 위해, 세고비아에 의한" 이라 덧붙여 적었다. 이와 같이 기타의 정상에 오른 세고비아였지만, 제트시대에 어울리게 세계 여러나라의 연주와 대학강의와 레슨을 마치 페가수스(Pegasus)와 같이 평생 누비고 다녔다. 마스터 클래스만도 9군데였는데, 이탈리아의 키지아나 아카데미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여름학교 강습등이 유명했다. 좌우지간 세고비아는 다른 연주자들과 다르게, 기타를 자신이 택했으며, 기타 예술을 인생 자체로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희망을 목표를 정해 놓았고, 이를 향해 죽을 때까지 혼신의 힘을 바친, 기타 5000년 역사이래 최고 명장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