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k Satie (에릭 사티)

노르망디의 옹프루르 출생. 옹프루르의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비노에게 피아노와 그레고리오성가를 배우고, 12세 때 파리로 나와 콩세르바트와르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아카데미즘에 반감을 느껴 이듬해 퇴학하고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1887년 처음으로 피아노곡집을 출판하여 그 특이한 악풍으로 파리악단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생계를 위하여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동안 드뷔시를 사귀게 되었다. 1905년 39세의 나이로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대위법을 배우고 1909년 졸업하였는데, 이 무렵에 콕토, 피카소, 댜길레프 등과도 사귀었다. 1916년 콕토의 시나리오에 곡을 붙인 발레곡 《파라드 parade》를 발표하고, 또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큐비즘 ·다다이즘 등의 예술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미요 등 ‘프랑스 6인조’는 사티를 높이 평가하여 그들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삼았으며, 1923년에는 6인조의 다음 세대인 데조르미에르가 사티를 중심으로 한 그룹을 만들어 ‘아르쾨유악파’가 출범하였다. 이와 같은 칭찬 속에서도 사티 자신은 불안과 회의, 정신적인 고독에 싸인 채 죽었다. 작풍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성에 있으며 작품에는 교향적 극작품 《소크라테스》, 발레음악 《파라드》, 피아노곡 《배[] 모양의 3개의 곡 Trois Morceaux en forme de poire》(1903)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Vértable prélude flasques(pour un chien)》 《바싹 마른 태아 Embryons dessénchés》 《관료적인 소나티네 Sonatine bureaucratique》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