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박하우스가 '건반 위의 사자'로 통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만년의 박하우스는 높은 정신성을 담은 구축적이고 균형잡힌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독일산 사자'라는 별명은 그의 젊은 시절을 두고 일컫기에 알맞다.
외모도 외모려니와 그는 젊은 시절, 독일 피아니스트로는 드물게 화려한 기교와 강렬한 힘으로 각광을 받았다.19세기 이후 피아노의 비르투오소는 동유럽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독일 작곡가들이 현란한 기교의 과시보다는 음악의 구축미를 중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기교파 박하우스의 등장은 20세기 초의 독일에서는 상당한 화제거리였다.
라이프치히에서 정통 독일계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난 그는 음악 애호가였던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7세 때인 1891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대 중반의 이른 나이로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1899년부터 당시 큰 스케일과 구축력으로 유명했던 위대한 피아니스트 오이겐 달베르를 사사하게 되었다. 당시 달베르는 연주와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제자를 한 명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박하우스는 달베르의 유일한 제자였던 셈이다. 그에게서 베토벤에 대한 해석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훗날 '기교파 박하우스'가 아닌 '예술가 박하우스'로 완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세 되던 해박하우스는 런던에서 최초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과 19세의 나이로 맨체스터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르투르 니키쉬가 지휘하는 라히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협연 호평을 받은 그는 1905년 루빈스타인 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이어지는 공연 요청속에 박하우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고 명실 공히 독일 최고의 권위자로서 인정 받게 된다.
1907년에는 솔딜스하우젠 음악원, 1926년에는 미국 커티스 음악원의 교수로일한 적도 있지만 그의 연주 활동은 끊임없이 이어져 1차 대전중 입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연주 활동에 몰두, 1969년 6월 26일 최후의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건반의 사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박하우스의 연주는 강인하고 완벽한 테크닉과 큰 스케일에 포인트가 있다. 그러나 남성적인 연주에도 불구하고 결코 극단적인 표현에 얽매이지 않는다. 예리한 분석력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에 대한 깊은 공감, 그리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완벽한 균형은 궁극적으로 인간미의 극단을 보여 준다. 특히 젊은 시절 친분을 맺기도 했던 브람스의 음악은 그가 자랑하는 레파토리로 다른 연주자에게서 찾을 수 없는 숭고함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