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전설적인 재즈 보컬리스트였던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는 선천적인 작은 목소리를 특유의 감성적인 집중력을 사용하여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녀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독특한 발성, 드라마틱한 창법,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인해 그 시대의 보컬리스트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어머니의 나이는 겨우 13세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을 떠나게 된다. 10살 때 강간을 겪은 그녀는 생존을 위해 유곽에서 잔심부름을 해야만 했다. 12세 때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는 그녀 자신이 창녀가 된다. 여기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과 베시 스미스(Bessie Smith)의 곡을 처음으로 듣게 된 그녀는 당시 영화배우였던 빌리 도브(Billie Dove)의 이름을 따서 빌리 할리데이라 개명하고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재능 있는 인물들을 물색하던 존 해몬드(John Hammond)는 빌리의 목소리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를 베니 굳맨(Benny Goodman)에게 소개시킨다. 존은 빌리에게 있어서 그 동안의 불행을 끊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베니는 존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녀와 레코딩 작업을 하기로 한다. 1933년, 겁을 집어먹은 데다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던 빌리는 첫 작품으로 'Your Mother's Son-in-Law'와 가볍고 우아한 느낌의 'Riffin' The Scotch'를 녹음한다. 마이크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던 빌리의 이 첫 작품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1933년에서 1944년 사이에 그녀는 200여 곡을 작업하나 그로 인한 로얄티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30년대 후반 그녀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아티 쇼(Artie Shaw) 등과 함께 공연한다. 1939년에서 45년 사이에는 여러 곡의 히트를 기록하는데, 'Fine And Mellow', 'God Bless The Child', 'Lover Man', 그리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Strange Fruit'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 나온 음반들은 재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빌리는 이미 헤로인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꾸준히 활동을 지속하여 북미에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녀는 영혼을 일깨우는 보컬리스트로서 추앙을 받았지만 개인사는 너무나 불행했다. 1940년대에 그녀는 3번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그 사이에 배우자로부터 학대를 받기도 했다. 콘서트에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레코드사는 그녀를 이용하는 데만 급급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돈은 약물을 구입하는데 쓰여졌다. 수년간의 마약 상용 후 그녀는 1947년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다. 그 후 유럽 투어를 시작하는데 이전보다 더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56년 다시 마약 때문에 체포되었다. 재활원에서 힘겨운 투쟁을 하던 빌리는 1959년 아까운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이른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장 인기 있고 극찬을 받았던 재즈 가수로 남아 있다. 음역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기술로 자신만의 표현을 가능하게 한 빌리의 앨범은 현재 정규 앨범과 베스트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을 통틀어서 100장이 넘고 있다. 또한 사후에도 빌리의 인기는 여전하여 계속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뮤지션들이 그녀를 기리고 있다. 유투(U2)는 자신들의 앨범 [Rattle And Hum] 에서 'Angel of Harlem'을 불러 그녀에 대한 추모의 정을 기리고 있다. 그녀의 암울했던 삶은 1972년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가 빌리 역을 맡은 영화 [Lady Sings The Blues]에서 다시 한번 재조명되었다. 글 / 원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