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출신의 미국 피아니스트. 바르샤바 근교의 로츠 출생.어려서 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여 불과 네 살때부터 공개석상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하는데, 10세 때는 베를린으로 가서 명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하임의 추천으로 리스트의 제자였던 하인리히 바르트를 비롯해 로베르토 칸, 막스 브루흐 같은 대가들을 사사했다. 1897년에는 쿠세비츠키의 지원으로 러시아 순회 공연을 떠났으며 그 이듬해 베를린에서 데뷔 무대를 갖고, 1905년 다시 파리로 이주해 연주를계속했다. 당시 그의 연주를 들은 생상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연주자'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해 감행한 미국 데뷔 무대도 큰 성공을 거둬, 명실 공히 국제적인 피아니스트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다. 1916년 스페인 연주 여행은 단 네 차례의 공연이 무려 120회까지 연장될 정도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다만 비평가들의 반응은 그다지 신통한 것이 못돼서 루빈스타인 자신도 심기가 불편했다고 전해지는데, 결국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연주를 극찬할 수밖에 없었다.
1차 대전중에는 주로 영국에서 지내며 이자이와 함께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1937년부터는 나중에 그의 주요 레퍼토리가 된 쇼팽의 곡에 본격적 으로 뛰어들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2차 대전이 발발 하자 이번에는 미국에 정착 실내악 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야샤 하이페츠, 에마누엘 포이어만(나중에 그레고르 피아타고르스키로 바뀜)등과 함께 했던 일련의 실내악 콘서트 역시 그의 명성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1954년에는 헐리우드를 떠나다시 파리로 향하게 되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여전히 강도 높은 레퍼토리를 주종으로 하는 일련의 콘서트를 개최 청중을 사로 잡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그를 위해서 페트루슈카 가운데 세개의 무곡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해 주었으며<피아노 랙 뮤직>을 헌정하기도 했다. 쇼팽 이래 최고의 쇼팽 연주자로 통하던 루빈스타인은 자유 분방한 낭만적 정취를 피아노에 듬뿍 담아내던 인물이었다. 매우 빠른 템포와강조된 기교, 그리고 일면 과장된 듯한 프레이징은 당시에는 매우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비평가들은 그의 연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물론 청중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지만, 직접 그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에 의하면 실연의 뛰어남을 레코드에 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방대한 레코드는 그 어떤 것도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윤기있고 선이 굵은 연주, 그러면서도 노래할 줄 아는 연주는 바로 루빈스타인만이 들려줄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쇼팽의 연주는 단순히 그가 폴란드인이라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접해 볼 만한 훌륭한 것들이다. 젊은 시절 또 한 사람의 쇼팽 전문 연주자였던 호프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본인의 말처럼 그의 쇼팽 연주는 비교적 주관적이 것이었다.
대체로 어느 작품이든 주관적인 해석은 찬반 양론을 대립기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본질이 본래 자유로운 인간 정신의 구현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자의적인 해석이 작품의 본질에 접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다소 역설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뛰어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자유롭지만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쇼팽, 그것은 작품에 대한 기본 정서를 섭렵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