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 초입에 활동한 러시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다. 그는 차이코프스키를 깊이 경애했고 그의 흐름을 이어 받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드러운 서정성이다. 풍부하고 부드러운 그의 선율은 강물이 흐르듯 폭넓은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에는 감미로움과 친근미가 있다. 그는 이러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무소르그스키나 보로딘 등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의 국미적 색채를 피하고 독일 낭만주의에 입각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척했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그의 특성은 차이코프스키와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스타일은 드뷔시, 라벨, 쇤베르크, 베버른 등에 의해 유럽음악의 기조가 변하던 시기에 나타난 것이다. 시기로 보아서는 말러나 리하르트쉬트라우스 후기 낭만의 맥을 잇는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여 차이코프스키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 1873년 라흐마니노프가 태어난 이듬해 쇤베르크가 태어났고 또 그 이듬해 라벨이 태어난 것을 보면 라흐마니노프가 고수한 낭만주의가 얼마나 시대를 역행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일련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시대적 명제보다 예술적 기품이 우위에 있음을 본다.
러시아 노브고로트 출생.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그 후 페테르부르크 및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A.실로티에게 피아노를, S.I.타네예프와 A.S.아렌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다. 재학 중에 이미 작곡을 시작하여 졸업하던 해인 1892년에는 가극 《알레코》와 피아노곡 《전주곡(내림마단조)》을 작곡하였다. 졸업 후에는 스크랴빈과 더불어 스베리오프에게 사사하였다. 1893년 평소 사숙하던 차이코프스키가 죽었을 때는 《위대한 예술가의 회상》을 썼다. 1899년 런던에서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얻고, 《피아노협주곡 제2번》(1901)으로 글린카상을 받았으며, 다시 드레스덴에서 교향시 《죽음의 새》(1906)를 작곡하였다.
1909년 미국에 건너가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 귀국, 1910∼1917년 모스크바극장 및 마린스키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연주활동과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패색이 짙어지자 모금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구국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후 소련 당국의 권유로 귀국준비를 하던 중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20세기 초 가장 탁월한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었으며, 《피아노협주곡》 제2번 및 제3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낭만파의 마지막 작곡가이기도 하였다. 작풍은 ‘차이코프스키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일종의 회고적 경향을 띠고 있다. 작품으로는 피아노곡을 비롯하여 관현악곡 ·가곡 ·합창곡 ·오페라 등 많은 곡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