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20세기 지휘사에 거대한 양대 산맥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토스카니니는 푸르트벵글러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치 동년배처럼 느껴지기 쉬우나 사실 그는 푸르트벵글러보다 19세나 연상이며 푸치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토스카니니는 1867년에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출생하여 1957년에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토스카니니의 아버지는 가난한 양복공이었다고 하며, 사립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 공교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가정교사를 두고 유럽각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음악적 소양을 익힌 푸르트벵글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부분이다. 게다가 그가 다녔던 보이트 음악원과 밀라노 음악원에서는 지휘가 아닌 첼로를 전공하였으므로 그는 지휘를 거의 독학으로 익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휘자로서 데뷔할 때의 사건은 거의 소설같은 이야기로 전해진다. 19세(1886년)에 오페라단에 첼리스트 겸 합창부지휘자로 입단한 토스카니니는 브라질에서의 '아이다' 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때 연습 도중 지휘자와 악단간의 불화로 공연 직전 지휘자가 갑작스럽게 사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급해진 오페라단에서는 그를 대신하여 부지휘자가 지휘를 하였으나 청중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고 이어서 지휘봉을 잡은 합창 지휘자도 역시 쫓겨나 버렸다. 이렇게 되자 평소 지휘에 대해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소문이 나 있던 토스카니니에게 기회가 돌아왔고 다급해진 극장측에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휘를 맡겼었는데, 토스카니니는 지휘대에 올라가서 악보를 덮어버리고는 암보로 리허설 한번 없이 이 대곡을 성공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일순간에 유명해졌다. 이 사건 이후부터 토스카니니는 본격적인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1892년에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탈리아 초연을 담당하였고 같은해에 레온카발로의 '팔리앗치'를, 1896년에 푸치니의 '라보엠'을 세계 초연하는 등 오페라 지휘자로서 확고부동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1898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아이다'를 지휘하고 1차대전이 끝난 후 1920년에 라 스칼라 가극장 관현악단을 이끌고 뉴욕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1926년에 뉴욕 필하모니의 제1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하고 1928년에 상임지휘자가 되어 1936년까지 재임하는 등 미국에서도 화려한 연주경력을 쌓아나갔다. 1930년에는 바이로이트 공연에 초청받아 바그너의 악극을 지휘하기도 하여 이탈리아 지휘자들이 경원시하였던 바그너의 음악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피해 미국에 정착한 토스카니니는 이후 여생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수많은 레코딩을 남겼다. 1936년에 70세로 뉴욕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를 그만둘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그는 은퇴하였으며 그의 시대도 끝났다고 생각하였으나 바로 그해 성탄절에 그를 위해 창립된 NBC 교향악단의 제 1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하면서 무려 17년의 세월을 더 활약하였으니 그의 늙을줄 모르는 정열에는 그 누구라도 경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토스카니니에 대한 일화들 토스카니니는 수많은 일화들을 남겼으며 그 대부분이 이제는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그의 초인적인 암기력을 들 수 있겠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가 심한 근시안이라서 연주회에서 악보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스코어를 암기하였다고도 하지만 이는 그다지 근거있는 이야기는 아니라 한다. 그는 3-4회 정도의 연습 이후에는 거의 모든 파트의 악보를 다 외웠다고 전해지며, 그가 암보하여 지휘할 수 있었던 곡은 대략 200여곡의 교향곡과 100여곡의 오페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대단한 정열의 소유자였는데, 남들은 은퇴할 나이인 70세에 NBC 교향악단을 새로 맡은 것과 그 이후 엄청난 양의 레코딩을 남겼던 것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바이다. 심지어 그는 90세부터 시작하여 10년동안 진행되는 새로운 레코딩 스케쥴을 계획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리허설때는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화내기 일쑤이고 레코딩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번이고 반복할 정도로 정열적인 노인이었다. 한번은 파티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60대 후반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저 늙은이들이 다 가고 나면 우리끼리 신나게 놀아보자" 라고 했다는데 이때 토스카니니의 나이가 8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열의 화신인 토스카니니도 나이는 이길 수 없었는지 초인적 기억력을 자랑하던 그가 1954년 4월 4일 연주 도중 갑자기 지휘를 멈추고 30초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사태가 일어났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토스카니니는 나머지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친후 우뢰처럼 쏟아지는 박수를 뒤로 하고 비틀거리며 사라졌고 그 이후 다시는 지휘봉을 잡지 않았으며 만년을 뉴욕과 밀라노를 왕래하면서 자신의 연주 기록들을 레코드로 만드는 일에 깊이 관여하다 1957년 1월 16일에 89세로 운명하였다.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혁신성 토스카니니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이 중 대표적인 것들을 언급하자면 첫 번째로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혁신성을 들 수 있겠다. 그가 처음 오페라 극장에 진출할때만 해도 오페라는 가수 중심의 무대로서 지휘자는 단지 보조적인 기능만 수행할 뿐이었으나 토스카니니는 이러한 관습에 과감히 도전하였다. 오페라 공연도중 멋진 아리아가 나오면 객석에서 앙코르를 요청하는 박수와 환호성이 터지고 가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번 더 멋지게 부르고는 하는게 당시의 일반적인 공연 분위기였으나 토스카니니는 곡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일관성 있게 지휘하기 위하여 이러한 상연도중의 앙코르를 일절 금지시켰다. 또한 청중들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내세웠는데, 예를 들면 당시의 귀부인들이 멋을 부리기 위해 모자를 쓴 채로 관람한다든지 공연도중에 관객석에 들어온다든지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일단의 조치들은 가수와 청중들 모두에게 대단한 저항을 받았으나 토스카니니는 전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1903년에는 재임 1년만에 라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 자리를 사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외적 조치뿐 아니라 오페라의 내용에 있어서도 베리스모 오페라나 바그너의 악극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탈리아 오페라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상징주의적 연출과 반리얼리즘 연극의 선구자이며 현대 무대 미술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아피아를 적극 유치하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인습에 찌든 사교장에 불과했던 오페라 하우스를 현대적인 예술공연의 무대로 전환시키는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지휘는 단원들로 하여금 세부적인 데까지 공부하도록 만들고 섬세하면서도 엄격한 리허설을 반복한 덕분에 오케스트라와 성악진의 음악적 기량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불같은 성미 때문에 많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당시 인기절정의 가수였던 제랄딘 팔라가 토스카니니와 말싸움이 붙었을 때 "나는 스타란 말이에요, 이따위 멍청한 지시는 하지 마세요"라고 하자 토스카니니는 "스타 좋아하시네, 별빛이 달빛 이기는 거 본적 있어?" 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할때도 자기가 뜻한대로 연주가 되지 않으면 얼굴이 불같이 시뻘개지면서 격렬하게 고함을 지르면서 화를 내곤 하였다. [신 그로브 음악/음악가 사전]의 토스카니니 항목에는 그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정력, 우직할 정도의 성실성, 임전무퇴의 의지와 억센 성격, 광적일 정도의 완벽주의, 병적수준의 자기 비판 등이 특히 눈에 띄는 성격이었다." 콘서트 지휘자로서의 업적 토스카니니의 뛰어난 재능중 하나는 오페라 못지 않게 교향곡 지휘에도 정열을 쏟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동세대의 이탈리아 지휘자에서는 그 예를 발견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토스카니니의 이러한 열정은 후세에 지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바도나 무티 등이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도 오페라와 콘서트의 지휘 양쪽을 훌륭히 양립시키면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최초로 콘서트 지휘를 한 것은 1896년의 스칼라 가극장 오케스트라 연주회였으며 이때 참석했던 생상스가 그의 지휘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 들을 수 있는 연주는 주로 노년에 활약했던 뉴욕에서의 녹음 이후가 대부분이다. 그는 낭만주의적인 전통에 젖어있던 동시대의 지휘자들이 자신의 개성을 지나치게 발휘하여 주관적 해석으로 가득 찬 연주를 남발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였으며, 지휘자는 작품을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보다는 작곡자가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살리는 데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신즉물주의' 라는 용어로 표현되며 이는 토스카니니의 다음 세대 지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작곡가인 아론 코플란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토스카니니에게 강조되는 것은 언제나 멜로디 선(line)과 전체의 구성이며 결코 세부나 특정 소절을 분리하여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연주를 통해 음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가게 되며 그러한 살아있는 음악을 듣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행운이다." 그렇다고 해서 토스카니니가 작품의 세부를 무시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엄격하고 철저하며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인 데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음악의 전체적인 흐름과 결합시켜 항상 유기적인 통일된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연주의 특징이다. 토스카니니는 스코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며 작품의 스타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개개의 작품이 지니는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연주를 하였는데, 이탈리아 작품에서는 그 선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듯이 최대한 살리면서 깔끔하고 정돈된 연주를 하고 독일 작품에서는 선율과 함께 리듬과 형식미를 조화시킨 웅대한 음의 건축물을 구축하였다. 그는 항상 멜로디를 강조하여 '노래 부르듯이' 연주할 것을 자주 악단원들에게 요구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이것은 성악적이라기 보다는 기악적인 선율미를 강조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자면, 감미롭고 편안한 느낌의 여유로운 멜로디보다는 루바토(연주자가 곡의 리듬을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것)를 최대한 억제하고 명확한 프레이징과 강한 악센트를 첨가하여 멜로디 라인이 선명하게 강조되는 효과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주가 자유로운 선율에 중점을 둔 푸치니의 오페라에서는 때때로 융통성 없이 경직된 듯한 느낌을 주는 역효과를 가져올 때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음악의 형식과 구조에 중점이 가해지는 교향곡이나 베르디의 오페라에 있어서는 오히려 큰 장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토스카니니의 연주는 강인한 리듬과 굵은 골격을 바탕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음악이 당당히 울려펴지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실로 그는 동시대의 지휘자들 중에서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마술사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와 함께 연주하였던 단원들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어 도취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였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지노 프란체스카티도 한때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일한 적이 있었으나 얼마 뒤 사임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토스카니니의 음악에 대한 확고한 주관과 열정이 마력처럼 자신을 사로잡아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토스카니니의 후배 지휘자들 중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는데, 젊은 시절의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받았던 인물 중 한사람으로서 토스카니니의 스타일이 너무 많이 가미된 해석을 보여 '토스카라얀' 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일류급 오케스트라는 과거에 토스카니니와 NBC 교향악단이 도달했던 수준의 기량을 이미 섭렵하였으며 토스카니니 식의 연주가 이제는 보편화된 경향이 많아 그의 연주를 지금 들어보면 신비감이나 신선미가 떨어지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것은 토스카니니의 연주가 낡은 스타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토스카니니 스타일의 연주를 우리가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토스카니니가 20세기 지휘사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위대한 인물이라 평가하는 여러 가지 근거중 하나이다. 글. 곽규호 1999/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