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si Björling (유시 비욜링)

예술의 절정기에 세상을 떠난 테너 스웨덴 출신의 테너 유시 비욜링은 카루소, 질리를 잇는 금세기 최고의 테너로 손꼽힌다. 북국적인 투명한 목소리를 지닌 그는 이태리 가수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지녔다. 그러나 뛰어난 음색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매력은 많은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는 고음역에서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았으며 약음에서의 유연함도 훌륭했다. 그의 아버지 다빗 비욜링은 메트로폴리탄에도 등장한 테너였고 어머니 역시 성악가였는데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비욜링의 형제 올레, 괴스타와 함께 비욜링 남성4중창단을 조직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그래서 그가 미국 무대에 선 것은 이미 9세 때의 일이었다. 그 사중창단은 한 멤버가 소프라노 소리를 낼 수 없게 되지만 않았어도 번성했을 것이다. 바로 비욜링의 목소리가 변성기를 지나 테너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 비욜링은 스톡홀름 음악학교에 1928년에 들어갔고, 1930년 6월에 로얄 스톡홀름 오페라 극장의 <마농 레스코> 공연에서 램프 불을 붙여주는 사람으로 무대에 올라갔다. 그의 공식적인 데뷔는 한 달 뒤에 <돈 조반니>의 돈 오티비오 역을 통해서였다. 몇 달 후에 그는 프라하, 드레스덴, 비엔나, 파리, 브뤼셀, 플로렌스, 런던 등의 주요 오페라 하우스에 데뷔했다. 그의 미국 경력의 시작은 1937년 로렌스 티벳이 리골레토 역을 맡았던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을 통해서였다. 메트로폴리탄 데뷔는 1938년 11월 24일 <라 보엠>의 루돌포 역을 통해서였다. 그는 즉각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일 트로바토레>, <파우스트>, <가면 무도회> 등을 불렀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스웨덴에 가서 6개월 동안 포병으로 근무했고 1945년에 메트로 돌아와서 <토스카>, <로미오와 줄리엣>,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마농 레스코>, <돈 카를로>를 불렀다. 메트와 1957년까지 노래하기로 했던 계약은 루돌프 빙과의 트러블로 인해 깨어졌다. 그 갈등은 돈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루돌프 빙의 글에 의하면 "당신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많은 돈을 아주 쉽게 요구하는구려." 그러자 유시는 쉽게 걸어나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1958년 3월의 콘서트가 빙과의 타협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비욜링의 감동적인 연주회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손자들에게 유시 비욜링의 기량이 최선일 때 그의 노래를 들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 직후에 있었던 플로리다 여행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쉬라는 권유를 받았다. 다소 의기소침 해졌지만 그는 계속 자신을 몰아부쳤고 목소리는 여전히 힘있었으며 스톡홀름 오페라 극장의 다음 시즌에서 경이롭게 다시 컨디션을 되찾았다. 그러나 1960년 11월 9일 그는 자던 도중 죽었다. 그는 술을 너무 좋아했고 말년에 들면서 주량은 더욱 높아졌으며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결과 일찍 쇠퇴해져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주 게으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오페라 공연 연습이 있으면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빠졌고 공연 거의 직전에 리허설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에도 그는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불렀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고집쟁이이기도 했으며 말수가 적고 완고하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는 평도 있다.(그의 리사이틀 반주자였던 이보르 뉴톤의 평) 그가 가장 주목 받았던 역은 <일 트로바토레>의 만리코였다. 그는 1939년에 그 역을 맡아 코벤트 가든에서 불렀으며 그는 그 공연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도 스톡홀름 로얄 오페라 극장에서 이 역을 공연한 바 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메트로폴리탄에 돌아왔을 때 가장 자주 맡았던 역은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역이었다. 또한 <투란도트>에도 뛰어났으며 그가 남긴 전곡녹음은 오늘날까지 최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악보에 있는 그대로를 충실하게 묘사했다. 외부의 이질적인 효과를 배제한 채 악곡 내부에서 그 곡의 특징을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리처드 모어의 말에 의하면 비욜링이 타계할 당시 그의 레코딩 스케줄에는 베르디의 <오텔로>와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같은 레퍼토리들이 잡혀 있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