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useppe Di Stefano (주세페 디 스테파노)

칼라스와 함께 1950년대 오페라계를 주름 잡았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1921년 벨리니의 고향이기도 한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 근처에서 태어났고 6살 때 밀라노로 이사를 와서 예수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들은 한 친구로부터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거쳐 직업가수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39년에 유명한 바리톤 루이지 몬테산토의 성악 클래스에 등록했다. 그는 이미 그 전에 테너 아드리아노 토르키오라는 사람에게 발성훈련을 받은 적도 있었다. 1943년에 밀라노에 있는 카리스탈로에서 대중적인 노래를 부르는 공연을 가지기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한달 후 이탈리아 군대의 부름을 받고 입대했다. 이듬해에 이탈리아 군대가 독일군에게 굴복하자 디 스테파노는 스위스로 도피하고 거기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두각을 드러냈다. 스위스 로잔시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기 시작했고, 즉각 그 지역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HMV에서 그의 첫번째 레코딩을 요청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밀라노로 돌아와 몬테산토에게서 다시 성악을 지도 받았고, 1946년에 레지오 아밀리아 시립 오페라 극장에서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의 데 그리외 역으로 오페라에 데뷔했다. 그것은 경이로운 성공이었으며 그 결과 그는 다음해 같은 역으로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고 2년 이내에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도 성공을 했다. 1948년에 2월에는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초청을 받아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으로 미국무대 입성을 했다. 디 스테파노는 그 후 1952년까지 미국에 머무르면서 메트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 고정 출연하였으며, 독창회를 통해서는 전 미국을 휩쓸었다.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 지역에서의 활동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이로써 그는 금세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52년 라 스칼라로 되돌아온 그는 이후 그 전설적인 오페라 극장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주요한 테너 역할 들을 거의 섭렵하였다. 초창기에 그는 <미뇽>이나 <몽유병의 여인>, <친구 후리츠>같은 가벼운 역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1953년 이후부터는 카니오나 투리두, 라다메스, 알바로 같은 무거운 역으로 레퍼토리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는 1951년 9월에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마리아 칼라스와 같이 노래를 불렀다. 이후로 그들은 자주 같은 무대에 섰고 EMI에서 함께 많은 오페라 전곡 레코딩을 남겼다. 그들이 이룩한 파트너쉽은 음악적으로도 훌륭했지만 극적효과 면에서도 뛰어나 오페라 배역에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들의 공연 하나 하나가 오페라계의 기념비적인 업적이었다. 칼라스가 은퇴했다가 1973년 세계 콘서트 여행으로 다시 청중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스테파노는 그녀와 동행하여 같이 공연을 했었다. 델 모나코, 코렐리, 베르곤지 등의 명테너가 활약하던 시대에 그가 조금 더 우뚝 서 보였던 것도 칼라스와의 파트너쉽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6년 빈 국립 오페라의 가장 인기있는 테너 가수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한 디 스테파노는 그 여세를 몰아 57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의 <사랑의 묘약>공연으로 영국 땅에서도 첫 선을 보였으며, 1961년에는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으로 코벤트 가든 무대에도 올랐다. 그때쯤 <투란도트>, <카르멘>, <서부의 아가씨>, <안드레아 세니에>, <라 죠곤다> 등과 같은 무게 있는 역들까지 진출한 대형가수가 되어 있었다. <토스카>나 <나비 부인>의 전형적인 테너 역으로부터 <팔리아치>의 드라마틱한 베리즈모, <마농 레스코>의 격렬함, <가면 무도회>의 벨 칸토 스타일, <미뇽>의 감미로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맹렬한 추진력 등 그의 레퍼토리의 무궁무진함이란 실로 경탄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주된 영역은 리릭이었다. 그 당시 드라마틱에서는 델 모나코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드라마틱까지 폭을 넓혔다 한들 델 모나코를 앞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베르곤지나 델 모나코가 즐겨 부르지 않은 프랑스 오페라인 <베르테르>, <마농>, <진주조개잡이>등에서 그는 특히 뛰어났고, <청교도>, <루치아>, <토스카>,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등 후세까지 기억에 남는 그의 명연은 다 리릭 영역이다. 그는 젊음을 무기로 너무 자신을 혹사시켰기 때문에 목소리의 쇠퇴기가 빨리 왔다. 칼라스가 빨리 쇠퇴하여 1960년대 중반에 은퇴하고 말았듯이 그의 쇠퇴기도 그쯤이었다. 그의 전성기는 1950년대의 10여년간이라고 볼 수 있다. 70년대에 들어서 파바로티와 도밍고가 등장하면서 그의 존재는 점점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디 스테파노가 아직도 명성을 누리고 있는 것은 나폴리 민요 때문이기도 하다. 나폴리 민요에 관한 한 아직도 스테파노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성악 애호가들의 견해이다. 스테파노의 노래가 훌륭한 이유는 나폴리어 특유의 엑센트나 발음을 완전히 터득한 완벽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고, 오페라 풍으로 힘껏 벨 칸토의 매력을 발휘하는 델 모나코나 코렐리의 목소리 보다는 싱싱한 젊음과 애잔한 정감을 담아 노래했기 때문이다. 맑고 낭만적이며 열정적인 그의 음색은 나폴리인의 정열을 표현하는데 적격이었다. 그는 목소리의 보존 보다는 어떤 역에 대한 자기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오직 시나 가사들만을 생각하라는 베르디가 전한 방식으로 노래하려고 노력했다. 주위에서 그의 노래 방식에 대하여 목소리를 해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지만 그는 쇠퇴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매일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낙천적인 그의 성품이 그저 노래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성악에 있어서 훌륭한 스승의 효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으로 그는 은퇴 후에도 한번도 학생들을 정식으로 가르친 일이 없으며 어느 누구도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